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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프 힐 링 Jul 15. 2021

소나기 같은 숙제

짧은 사랑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은 우리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 걸어서 가면 조금 긴 산책길 정도다. 나의 관심 영역이긴 하나 지척에 있으니 늘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이사 날짜가 점점 다가오니 이 지역을 벗어나기 전에 꼭 다녀와야겠다는 다짐을 숙제처럼 하고 있다. 숙제처럼 여기지 않으면 그냥 흘러 버릴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허락한 여유와 불안한 예감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이 불현듯 생겨서가 아니라 5년 넘게 미룬 숙제를 해결해야 가뿐히 이삿짐을 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미룬 숙제 하듯 마음을 짊처럼 여긴다는 건 그의 순수문학의 세계와 굳은 정신의 기치를 잊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이 나이쯤 되면 꼭 해야 한다는 게 없어지게 마련인데 한가한 시간이 열리면서 점점 그의 세계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는 나를 본다.


늦은 장마라고 하지만 연이어 작열하는 태양에 온 세상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몸이 시린 걸 싫어하는 남편 탓에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로 선풍기 2대로 여름을 이겨내고 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에어컨을 입에 올렸다.    

 

“작년에 설치할 걸, 몸의 온도가 정상이란 말이지?    


그의 혼잣말이 참 듣기 좋다.

양평은 우리에게 삶의 연장을 경험하게 한 축복의 장소이다. 이곳의 공기와 이곳의 물과 이곳의 사랑으로 우리의 황금기를 다시 기록해 간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난다는 두물머리는 산책코스였고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새벽 물안개처럼 신비로웠다. 살아온 시간과 달라진 시간의 틈을 비집고 선 삶의 향기가 새벽 물안개처럼 감격스러웠다는 것이다. 한차례 파도가 지나고 나면 온갖 버려질 배설물이 육지에 늘려있다. 바다가 토해낸 소리다.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긴 것이다. 세미원은 또 어떤가. 지역의 주민이 아니기에 번번이 몇천 원을 주고 입장해야 하지만 그곳에는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올법한 징검다리가 있다. 길을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가 아니라 길을 따라 물길을 낸 돌다리가 얼마나 이쁜지 갈 때마다 그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난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물이 낸 길을 따라가면 어느 사이 집으로 향하는 출구가 보인다. 서둘러 뛰어간 사람도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간 사람도 당도해서 기다리는 건 마찬가지다. 특히 청정지역인 이곳이 더욱 좋은 건 황순원 문학관이 있어서다. 늘 맘에는 있었으나 선뜻 나서지 못했었다. 준비되지 않으면 들어서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의 경계를 다가오는 이사 날짜가 허물어 준 것 같다. 가자고 말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코로나 이후로 화장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괜스레 화장대 앞에 앉는다. 마스크를 하고 나면 눈과 이마만 보이는 화장을 굳이 하기로 마음먹는 건 천천히 아껴가며 그를 만나는 설렘을 쟁이고 싶어서이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가 모든 걸 관여하고 있다. 화장 실력도 줄이고 있다. 순서도 잊었다. 눈썹부터 그렸었나? 평소와는 달리 단정한 얼굴과 차려입은 옷매무시를 살피며 먼지 쌓인 구두도 꺼냈다. ‘반드시 신고 나가야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높은 구두를 신었다. 신자 말자 곧장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발이 아프다는 걸 느꼈지만 구두를 신어야 제격인 차림새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없이 지나간 길이었지만 왠지 오늘은 품격 있는 거리로 변한 것 같았다. 구두를 신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잠시, 문이 열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장애인 차량 외는 주차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다시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신발이 걱정이었다. 눈치챈 남편은 얼른 집에 가서 신발을 바꿔 신고 오자고 종용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정중함의 마지막 세팅이 신발 같아 편하고 싶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열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경사진 오르막이 신경 쓰였다. 남편의 말을 들을 걸 잠시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되돌릴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란 말을 누가 했을까 참 공감이 갔다. 순간순간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이밍을 놓치고 살아간다. 오늘도 나는 타이밍 하나를 놓치고 있다..




 1층은 문이 닫혀 있었고 왼쪽 계단을 돌아 2층으로 올라갔지만 역시나 발길 멈춘 관람장은 쓸쓸했다. 외로웠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백설 공주처럼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한 소녀가 나를 반겨줄 것 같은 상상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나만의 의식 의례였다.   

  

문 하나가 열린다.

징검다리가 놓여있고 발아래로 오색찬란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맨손으로 잡아보려는 장난스러운 동작을 남편이 하고 있다. 과학의 첨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점점 우리는 소년과 소녀가 되어간다.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소년은 언제쯤 만질 수 있을까. 과학의 한계가 궁금해진다.


“에그 이놈 어딜 도망가 서! 서라니까!!”


잡힌 듯이 도망가는 물고기들의 자유로운 유영을 따라 나도 덩달아 첨벙 물속으로 뛰어든다. 발이 젖지 않는 물속으로 말이다. 기억의 더듬이를 앞세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어제가 암울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현재 나의 위치가 과거를 결정하듯 이 순간 나의 과거는 참으로 달콤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사랑이었다. 아니면 짝사랑이었을까

잠자든 기억의 파편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켰고, 속속들이 나의 첫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남편은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지 홀로의 시간을 위해 슬쩍 자리를 피해 줬다.


고2였다.

교정 벤치 위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제법 나풀거리는 바람 잦은 날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조잘거리는 우리를 향해 자그마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햇빛을 등진 실루엣이 잦은 바람에도 머리카락 하나 흔들림 없이 마치 석고상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 같았다. “얘들아 여기 교무실이 어디지?” 직감적으로 국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었다. 경상대학교를 갓 졸업한 총각 선생님이라는 정보가 이미 돌았기 때문이다. 남녀 공학인 학교라 남학생들은 좋아할 리 없었지만 우리는 들떠 있었다.


모두를 설레게 한 국어 선생님. 뽀얀 피부에 짙은 눈썹은 지금 생각해보니 송승헌 눈썹과도 닮아있었다. 어느 날, 창틈으로 새는 바람을 느끼며 '포도'란 자작시를 읊어 주었다. 대학 시절 장원 먹은 시라고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 후로 나는 대학을 꿈꾸었고 시인을 꿈꾸었다. 시화전을 개최하고 빈 교실을 헐어서 도서실을 만들고 수시로 제목을 던져주시며 글을 쓰게 했던 국어 선생님. 점점 채워져 가는 도서실 책들을 정리하면서 국어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도서실을 꽉 채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즈음에 합천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일 년, 너무나 짧고 긴 일 년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력이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억의 한 컷이 잔잔한 물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소녀는 소나기 같은 짧은 사랑의 흔적을 입고 떠난다.


우리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만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해도 될 권리를 찾는 것 같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일상이 초췌해지고 피폐해져도 돌아갈 순수가 그대로 있는 한 거기 기대어 한순간 행복해도 되지 않을까. 큰 한숨 한 번으로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31인 문인들의 엽서 전을 돌아 밖으로 나왔다. 손 편지지와 봉투 한 묶음도 챙겼다. 숙제를 마쳤는데도 무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오늘은 숙제를 마친 것으로 만족하자!   

 

다시 가야 할 듯한 예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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