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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Dec 31. 2020

어느 가을 날의 약리학 실습

약리학 실습 날이었다. 란셋으로 서로의 손가락을 찔러, 유리일지 플라스틱일지 모를 얇은 관에다 절반이 넘게 붉은 피를 빨아당겨야 했다.  실험을 통해 우리는 서로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을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알게  예정이었다.


교수님은 마이크를 잡고 우리 모두에게 실험에 대해 설명해주신 다음, 아마도 실험과는  삶을 살아와 실험실에서 가장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내가 있는 우리 조로 친히 걸어오셔서는, 몸소 실험 시범을 보여주셨다. 나는 친숙하게 느껴지는 란셋을 집어 들어, 동갑내기인 동기 녀석의 손가락을  야무지게도 찔렀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흘렀는데도  용감한 동기 녀석은 생각보다 별로 아프지 않다며 참말일지 거짓말일지 모를 고마운 말을  주었다. 수근거림.  번째 시범 채혈이 그렇게 끝나고, 조심스럽게 다른 조원들도 자신의 짝과 채혈을 하나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 이젠  차례구나. 하는 순간, 뒤쪽 조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처음에는 무슨 쇠로 된 저울 같은 걸 떨어트렸나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기 하나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놀라서 숨구멍이 조여든 목소리. 이런 비명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것이 언제였더라.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우수수 늘어서 있는 흰 실험가운의 장벽을 뚫고 그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창백한 얼굴, 늘어진 팔다리. 아. 우리 지금 채혈 중이었지. 그럼, 미주신경성 실신....


몇몇 동기들은 쓰러진 아이의 머리를 받쳐들고 있었다. 책상에 부딪힌 건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른쪽 옆구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고는, 발치에 있던 동기들에게 다리를 들고 있게 했다. Carotid를 찾으려 했으나 머리를 들고 있어 목이 앞으로 약간 구부러진 상황. Femoral 쪽은 다리를 들고 있게 했으니 남은 것은 Radial. 다행히도 Pulse는 느리지만 온전했다. 그리고 1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동기의 얼굴 근처에서는 옅게 따스한 바람이 옅게 스쳤다. 그렇다면.


 OO아, OO아.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동기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던 몇 초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깜박이고, 일어나려 하고. 의식이 돌아왔다. 모두의 머리 속에 아주 잠깐 다행이다, 라는 글자가 스친 그 순간, 머리를 받치고 있던 동기가 비명을 질렀다. OO이, 피 나! 그럼 그렇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외상이 없을 리가. 하지만 목을 받쳐줄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뒤통수에 있을 상처를 봐도 되는 걸까? 동기의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계시던 교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서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흰 가운을 벗고 동기의 뒤통수부터 이마까지 단단히 동여매셨다. 그리고 시작된 압박…주변 동기들에게 물었다.

OO이, 혹시 피 뽑다가 쓰러진 거야?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란셋으로 찌르고서 쭉 짜내고 있는데 어지럽다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눈을 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고.


 119와 전화하다 의식이 있느냐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던 동기가 나를 바라보았다. 의식? OO아, 혹시 오늘 무슨 요일이야? 힘없이 수요일이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OO아, 우리 지금 어디에 있어? 실험실…OO아, 내가 누구야? 헛웃음과 함께, ㅁㅁ언니… 전화기를 건네어 받았다. 네. TPP 있어요. Rate 60대, regular하구요. OOO호로 오시면 됩니다. 빨리 와 주세요.


자. 이제 곧 119가 오겠지. 그동안 뭘 하면 좋을까.

OO아, 혹시 예전에도 이렇게 피 보고서 쓰러진 적 있었어? 네…그랬구나. OO아. 119 불렀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 좀 어지러울 수도 있는데 가능하면 눈 뜨고, 잠들면 안 돼. 혹시 핸드폰 잠금 풀 수 있겠어? 부모님께 전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동기는 휘청거리는 손으로 핸드폰 비밀번호를 눌러 주소록을 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간신히 가리키는, 하트가 붙어서 저장된 번호 하나. 이 번호야? 알겠어. 내가 연락 드릴게. ■■아. 이쪽으로 와서 Pulse 좀 잡아주라.


신호가 가는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내가 이 전화를 걸어도 되는 건가? 내가 알려도 되는 건가? 교수님께 바꿔드려야 하나? 교수님? 어떻게 하면 좋죠?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OO이 어머님이시죠. 저는 OO이 동기 OO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OO이가 실습 중에 조금 어지러워서 쓰러졌는데, 응급실에 가게 될 것 같아서,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렸어요. 네. 조금 다쳤습니다. 네. 네. OO대병원 응급실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네.


동기의 이마를 동여맨, 피 묻은 가운에 교수님의 구슬땀이 흘렀다. 아, 참. 여기 2층이었지. 혹시 누구 바깥에 나가 있어? 몇 명의 동기들이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 엘리베이터도 잡아야 할 것 같아. 몇 명의 동기가 더 밖으로 달려나갔다.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몇 분이 흐르고 드디어 구급대원이 도착했다. 그 사이에 알아낸 몇 개의 기저병력을 더 주워섬기고, 동기의 안경과 핸드폰을 가운 왼쪽 주머니에 꽂아주며, 네 물건을 여기에 에 두었다고. 대답이 시원치 않아 교수님께도 알려드리고. 황급히 구급차를 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늘처럼 곤두선 신경. 동시에 느껴지는 지독한 씁쓸함. 차라리 저 아이가 쓰러진 곳이 병원이었으면 루트라도 잡고 생리식염수라도 full drop했겠지. 혹은 RBC가 달려 있었더라면 힘껏 쥐어짜기라도 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그저 다리를 올리고, 119를 부르고,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확인하는 것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 아직도, 아직도.


 전공을 다시 선택하고서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세 번쯤 더 이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이 무력감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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