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당역 근처, 애완동물 가게가 모여 있는 큰길에, 작은 가게 하나가 간판도 없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도 동물을 좋아하는 나는 그 길을 지나갈 때면 걸음이 절로 느려지곤 했다.
그날은 기타를 메고 친구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앵무새와 거북이와 토끼를 보며 표정으로 잔뜩 귀여워해 주다가, 인도 한가운데 놓인 새장을 보았다. 분홍색 철창 아랫부분이 반쯤 녹슬어서 주홍색이 되어버린 낡은 새장 속에는 새끼 고양이가 두 마리 갇혀 있었다. 하얀 바탕의 젖소 무늬 고양이 한 마리, 고등어 태비 한 마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두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울어댔고, 나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발을 뗄 수도 없었다. 기타가 꽤 무거웠는데도 들쳐 메고 그저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회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하늘색 점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울어대는 목소리는 나를 점점 더 옭아매었다. 감히 그 아이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제키, 그 아이의 이름은 제키였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떠오른 그 이름 말고는 다른 그 어떤 이름도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작은 상자를 안고 버스에 앉아 있었다. 신문지가 깔려 있던 박카스 상자. 제키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설사를 잔뜩 했고, 그제야 어딘가 아프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곧바로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예방접종에 진료비까지 사흘 전에 받은 알바비를 절반 이상 병원비로 써야 했지만, 아무런 상의도 없이 동물을 데려왔으니 어머니가 머리끝까지 화를 내실 게 꽤나 분명했고, 잘한 일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 아이와 함께하는 게 옳은 결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키는 나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나만 좋아했다. 가족의 동의 없이 데려왔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아이는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내 방에서 잘 나오질 않았다. 밥을 먹으려 부엌에 있으면, 그 한 발자국을 더 떼지 못하고 문지방 앞에 서서 식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울었다. 왜 자기가 갈 수 없는 곳까지 가냐는 듯이.
좋은 집사는 아니었다. 제대로 키우기 위한 공부는 부족했고, 새 장난감으로 아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더 좋은 사료를 사 주려고, 따위의 핑계로 알바를 늘렸다. 가끔 알바가 없어서 집에 같이 있는 날에는 다리가 저려서 움직이기 힘들 때까지 무릎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제키는 유일한 내 편이었고, 이 아이의 세상에서 나는 유일한 같은 편이었다. 비싼 고양이 전용 캔과 꿩 깃털로 만든 장난감, 몇 년은 거뜬히 쓴다는 커다란 스크래쳐를 사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제키는 더는 장난감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어른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간호학과 4학년, 해외 프로젝트를 위해, 계절학기 교류수업을 듣기 위해. 병원 면접을 위해 집을 한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제키는 발목이나 팔을 물고 할퀴었다. 엄마는 저거 보라며, 고양이는 주인을 알아볼 줄 모른다며 혀를 차셨지만, 오히려 알아봤기 때문에 할퀴었다고 생각했다. 너, 왜 보이지 않았느냐, 너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서울로 취직했다. 앞으로 2년간 내가 묵게 될 곳은 기숙사였다. 고양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벌어놓은 돈 한 푼 없는 내가 강남 한가운데에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제키를 대구에 두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병원은 숨 막혔다. 하지만 병원만 벗어나면, 놀 거리가 넘쳐나는 서울이었다. 예전보다 더 비싼 사료, 구름 같은 고양이 전용 쿠션과 장난감을 대구로 보낼 수 있게 되었지만, 막상 내가 대구로 가지는 못했다. 못한 건가? 안 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만큼 서울이 주는 맛에 푹 빠져 있었다.
1년, 2년이 지나고 어느 날, 오프가 생겨 대구에 내려갔다. 그동안 제키를 썩 좋아하지 않는 엄마와, 엄마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제키 사이에 오고 간 것은 밥과 물 뿐이었는지, 아이의 등에 털이 잔뜩 엉켜 있었다. 아무리 해도 엉켜버린 털은 풀리질 않고, 털을 빗어보려 할수록 늘어나는 것은 내 손등 위에 상처뿐이라, 결국 과감하게 가위를 들고 털 뭉치를 잘라내었다. 거대한 땜빵을 보며 속이 상해서, 괜히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다가 결국 싸우고 서울로 올라갔다. 기숙사를 나가게 되면, 제키를 어떻게든 서울로 데려와서 함께 살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서. 코앞에 두고서 반질반질 윤이 나게, 예쁘게 가꾸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겨우 구한 원룸은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고양이 털이 없는 이불과 말끔한 방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나는, 제키를 대구에 방치했다. 비싼 사료와 더 비싼 고양이 모래를 보내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암이 발견되었다.
당연히 엄마는 고양이를 더 돌볼 수 없었다. 심지어 수술을 하고 난 다음 엄마를 보살펴 줄 사람도 없었다. 서울에서 함께 지내자고 해 보았지만, 코딱지만 한 원룸에 사느니 차라리 암 환자 전용 요양병원에 들어가겠다는 엄마는, 제키를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 마당에 풀어놓자고 했다. 그 편이 고양이에게도 더 나을 거라면서.
눈물을 흘리고, 악다구니를 쓰고,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제키를 안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겨울이 시작되는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낡은 컨테이너 창고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바닐라 색 고양이 쿠션과 분홍색 이동장을 두고서, 오랜만에 만나 아직 손과 발에 회포도 풀지 못했는데 감히 이동장에 넣어 심기를 어지럽힌 이 인간에게 화가 나는데, 생전 처음 접해본 이 낯선 환경에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제키를 두고서 또 엉엉 울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다치지 말라고.
생각보다 시간은 빠르고 맹세는 쉽게 옅어진다. 2016년, 엄마는 수술을 마쳤고, 방사선과 항암요법을 마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함께 살게 되면 제키를 시골에서 데려오자고 했다. 2017년, 엄마는 요양병원을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가끔 제키 사진을 보내주곤 했다. 잘 있더냐, 건강해 보이더냐,라고 물으면 항상 쌩쌩하다는 답변만 들려왔다. 비싼 사료를 보내는 주소는 할머니 집으로 바뀌었다. 2018년, 병원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가 의전원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매일 사랑을 입에 담던 그 사람은 친구와 일본 여행을 가더니, 헤어지자는 말을 쓴 편지를 부쳤다. 그 편지가 바다를 건너오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가 편지를 부치고 내가 편지봉투를 열어보기 직전까지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 집에 가서 만난 제키는 영역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덧나, 왼쪽 귀와 목덜미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외삼촌에게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잘 지내고 있다며, 건강하다며, 쌩쌩하다며! 막내 외삼촌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패악을 부렸다. 퇴직금을 긁어모으고, 적금, 보험을 깨고, 계약이 남아 있던 서울 원룸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으며 만든 돈으로 잔디밭과 뒷마당 숲을 뛰어다니는 제키를 잡아 와 수술을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빌었다. 제키는 사람 나이로 치면 이제 50대, 60대 할아버지 아님 아저씨라고, 영역싸움에서 더는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할머니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고 제발 집에서 돌보면 안 되냐고. 베란다에만 두겠다고. 공부하느라 늘 내가 집에 있으니, 청소 다 하겠다고. 엄마는 수술 실밥을 뽑을 때까지만 집에 두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제키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이, 내민 손에 코를 내밀고 몇 번 킁킁거리다 머리를 비비다 박치기를 하고, 그러다 쓰러지듯이 드러눕고, 이마를 긁어 주면 사르르 눈을 감았다. 이름을 부르면 꼬리를 흔들고 일로 와! 하고 부르면 다가왔다. 공부로 과열된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핑계로 제키 옆에 앉아 털을 빗겨주며 아이를 보니, 호랑이 줄무늬 같던 아이의 털은 피부를 당겨 붙이느라 비대칭이 되어버렸고, 고운 앞니가 몇 개나 빠져 있었다.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시골에 보내면, 다음엔 더 많이 다쳐 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내 억지였는지, 그 넓은 마당과 숲을 제 것처럼 뛰어다니다 좁은 베란다에 갇히고, 맛도 없는 가루약을 하루에 두 번이나 먹고, 팔자에 없는 수술을 받자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을 터. 제키에게 곰팡이성 피부염이 찾아왔다. 아이는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야속하게도, 이동장 문을 열자마자 번개같이 뛰쳐나가더라. 몇 주 후, 다시 찾아간 할머니 집에서 만난 제키는 피부염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2019년,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학교는 심지어 강원도 춘천, 대구와는 왕복 8시간이 걸렸다. 주말 이틀 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가 돌아오면 어김없이 입술이 부르트거나 혓바늘이 돋고,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쓸데없는 감투 욕심에 맡은 일은 점점 많아졌고 공부가 감당하기 버거워지면서, 시험이 목을 죄어왔다. 해부학이라는 산을 하나 넘고 나서야 겨우 제키 생각이 났다. 사료는 다 먹었을까, 간식 캔을 더 사서 보낼까, 어디 더 다치진 않았을까. 대구로 향했다. 금요일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밤 11시,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 기절하듯 잠든 다음 날 아침, 아직 침대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너, 놀라지 말아라. 제키가 죽었다더라.
너무 놀라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게 진짜일 리 없어’라는 노래 가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이 귀로 들어와 고막을 흔들고 청신경을 거쳐 측두엽에 도달해서…. 아무튼, 잠 기운이 사라졌다. 순간 치솟은 것은 분노였다. 왜! 언제! 왜 말 안 했어! 내 제키!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았을 때 보다 더 많이 울었다. 엄마는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다지만, 글쎄, 나중에 듣는다고 해서 딱히 공부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펫로스(Pet Loss) 증후군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모든 공부를 미루고, 수업 시간에도 울컥 눈물을 흘렸다. 주중엔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주말만 되면 춘천을 뜰 생각만 했다.
눈물이 그치자 무미건조함이 찾아왔다. 별생각도, 감동도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네이버 웹 소설, 웹툰을 지겹도록 보다가 지쳐 잠들었다. 월화수목금토일,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날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일찍 일어나 강의실로 끌려가야 한다니. 끔찍했다. 이 기분을 어떻게 회피할지 고민하다가, 월요일 웹툰 중에서 가장 끌리지 않던 담백한 색에 담백한 제목이 담긴 웹툰을 눌렀다. ‘플랫 다이어리’
첫 화를 보고서 반해버렸다. 그리고 그동안 이 웹툰을 보지 않은 자신을 마구 칭찬해주었다. 덕분에 볼 회차들이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몇 화 되지 않아 금방 아쉬워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다음 주 일요일 밤이면 또 올라올 테니까. 잔잔하지만 가볍지 않은 주제를, 여러 번 곱씹고 삼키고 정제한 다음, 조심스레 이야기로 만들어 건네는 이 웹툰이 너무 좋아서, 난생처음으로 만화에 댓글도 달아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가님의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또 정말이지 처음으로, 웹툰 단행본을 샀다.
2019년 11월 10일, ‘무지개다리’라는 회차가 업데이트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울다가 퉁퉁 부어서 붕어가 된 눈으로 학교에 갔다. 대구에 가기 전에 제키 생각이 났던 건, 제키가 날 부르고 있어서였던 걸까. 당장 대구로 갔어야 하는데, 멀다는 핑계로 못 가서 내가 늦어버린 걸까. 무지개다리를 건넌 제키는 과연 못난 집사를 기다려주고 있을까. 단행본을 받은 다음, 같은 회차를 보고 나서 또 울었다. 이쯤 되면 제키의 ‘제’ 자만 떠올라도 눈물이 나는 게 아닐까 싶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아보자면, 정말 어렵지만, 제키가 수술받고 집 베란다에서 잠깐 지낼 때, 얼굴과 손등에 와 닿는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이 여리게 불어오는데, 손끝에 잡히는 털이 따끈하고 보드라웠던 순간. 그 순간이 떠오르는 페이지가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누구나 그런 책이 있을 거다.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서, 언제든 울거나 웃게 하는 책. 내게 플랫 다이어리는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