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사삼공삼 Dec 31. 2020

굶어죽지 않으려면 설거지부터

 사흘째였다. 출근하기 전 시리얼을 대충 한 공기쯤 찬 우유에 말아 마시고, 더럽게 맛없는 병원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깨작깨작 먹고서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은 게. 나름 맛을 챙기겠답시고 파에 계란까지 야무지게 넣고 잘 익은 김치를 곁들여서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라면이 늘 그렇듯 맛있었지만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한다. 네이버 지도는 하트 표시해둔 맛집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서울에서 밥을 먹으려고 지하철을 타다가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고 마치 반대 방향에 있는 맛집을 가려고 한 것 처럼 길을 안내할 수 있다. 항상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가고, 긴 줄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줄 설 일이 없도록 미리 예약해두는 걸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러나 줄창 외식만 할 수는 없는 노릇. 배달음식에도 물려버렸다. 이젠 정말로 뭔가를 직접 만들어 먹어야 했다. 모든 맛의 기준인 엄마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엄마는 300km 이상 떨어진 곳에 계신다. 손재주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지 않은가. 위가 줄어서 한번에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기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다양하게 만들어 먹고 싶다는 욕심에 요리 클래스를 등록했다.


 첫번째 수업으로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반짝거리는 ㄷ자 대리석 식탁에 앉아 쉐프님이 만들어주시는 코스요리를 맛보았다. 10주 후에 이걸 똑같이 만들어내야 한다니 좀 막막했지만,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요리를 만들며 사용할 조리실도 깔끔하고 정갈했다. 무를 썰며 기본적인 칼 사용법을 배우고 돌아와, 한껏 기대에 부풀어 무슨 칼을 살 지 고민하다 보니 일주일이 다 지나고 두번째 수업날이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정말 그날 음식을 만들어서 집에 가져가야 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로 쉐프님이 말씀하시는 걸 받아적고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며 뭔가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예쁘게 칼집을 넣어 잘 구운 가지는 지금까지 먹어본 가지무침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지가 맛있을 수도 있다니! 플레이팅까지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알류미늄 호일에 가지를 담고 치즈를 잔뜩 뿌려서 곱게 집으로 가져왔다. 가지 구이는 그 후 이틀간 내 아침과 저녁이 되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분명 가지구이는 맛있었지만 이래서야 매일 라면을 먹던 것과 뭐가 다르지? 냄비를 설거지하고 라면을 끓이는 게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데우는 걸로 바뀌고, 조금 더 건강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말고는 큰 차이가 없잖아. 칼질을 더 잘하게 된 건 확실한데, 정말 요리를 배우고 있는 게 맞나? 일주일에 한 번 고급진 요리를 포장해오는 거랑 뭐가 다르지?


 의문 속에 세 번째 수업으로는 라자냐를 만들고, 네 번째 수업으로는 판체타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뭔가 바뀌기 시작했다. 후다닥 말아먹던 아침 시리얼에 견과류와 건과일을 넣고,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사와 버터와 로즈마리를 뿌려서 구워 먹었다. 예쁜 플레이팅은 덤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두 가지 닭 요리와 두 가지 파스타, 샐러드까지 곁들인 파티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뭐가 바뀐 거지?


 긴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이거였다. 설거지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 청소가 좋아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타일 사이를 칫솔로 문지르는 게 취미이면서도 설거지만은 단 한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다. 물이 옷에 튀는 것도 싫었고,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만지다 비누거품에 손이 미끄러져 그릇을 떨어트리는 것도 싫었다. 웃기게도 잘 마른 그릇을 찬장에 정리하는 것은 좋아했다. 하지만 씻은 그릇이 없는데 잘 마른 그릇이 생길 리가.


 하지만 요리 클래스에서는 그 날의 메뉴를 다 만들고 나면 조리도구부터 가스레인지, 심지어 음식물 찌꺼기가 고이는 싱크대 하수구 그 아래까지 세제를 묻힌 스펀지로 문질렀다. 맙소사. 살면서 그 하수구에 손을 넣고 문지른다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겨우 못 쓰게 된 칫솔로 몇 번 문지른다거나, 발포 곰팡이 제거제를 던지고서 잊어버리는 정도가 다였다. 하수구가 그런 구조일 줄도 몰랐고, 그게 분리가 되는건지도 몰랐다. 자취 경력 6년이 요리 클래스에서 배운 싱크대 마감 앞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


 문화충격을 겪고 나자, 집에 쌓인 설거지가 눈에 들어왔다. 신경쓰지 않을 때는 안 보이지만 저 아래에 검은 곰팡이와 묵은 기름때가 모여 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어 버린걸. 가만히 둘 수 없지. 수세미 하나를 버릴 각오로 맹렬히 달려들어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고 나니, 다음 날 아침에 숟가락이나 그릇을 다급히 헹구거나 비상용 일회용 수저를 찾지 않고서도 맨들한 그릇에 시리얼을 담아 먹을 수 있었다. 남은 시간엔 그 시리얼을 더 맛있게 만들어 먹을 궁리를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깨끗한 후라이팬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을 켜고, 버터를 녹이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럼 또 설거지를 할 힘이 났다.


 요리학원에서 배워 온 건 설거지를 제대로 하는 방법이었다. 설거지를 제때 해 두니 바쁜 아침에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고, 저녁도 든든히 챙겨먹을 수 있었다. 요리를 배우러 식당에 가면 3년동안은 설거지만 한다고 하던가? 요새도 그런지는 알수 없지만, 확실히 설거지는 요리의 기본이라는 걸 깨달았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설거지부터 해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