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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Mar 31. 2021

신원석 '힘껏 면발을 흡입하던 너의 입술이 그리울 때'

서평

신원석 작가님께.


우선 죄송합니다. 서평이 많이 늦었습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변명거리들이 있지만, 일단은 접어 두려고 합니다. 그저 게으른 탓입니다. 다정하게도 작가님은 시집을 받고 서평을 쓰기까지의 기한을 정해두지 않으셨지만, 가끔은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과제가 더 무서운 법이지요. 제 뒤에서 호랑이처럼 쫓아오던 서평에 대한 압박이 이제는 가시길 바랍니다. 사실 서평은 처음 써 보는지라,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습니다.


서평단에 도전할 자격 중 하나는 ‘시를 좋아할 것’ 이었습니다. 네, 저는 시를 좋아합니다. 여덟 살의 저는 시를 지어서 멋진 보라색 공책에다 또박또박 적고, 그 시에 어울리는 색을 가진 색연필로 바로 옆에 적은 시와 영역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페이지에 한 시만 적기에는 적을 시가 너무 많았고, 공책은 얇았거든요. 주로 계절과 식물에 대한 시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보물상자 속 어딘가 잠들어 있을 그 시집을 꺼내면 서른두 살의 제가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 저는 수능을 치고 나서 수학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정확히는 수학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은 해야 하니 억지로 전공 서적을 머릿속에 욱여넣었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은 활자들은 눈으로 들어왔다가 잠깐 머무르고는, 곧 뒤통수로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전문학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시를 모아 놓은 책을 사 읽으며 깔깔거리던 고등학생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 생긴 새로운 관심사인 노래 속 가사에서 가끔 비슷한 즐거움을 느끼고는 했습니다만, 순수하게 글자로만 이루어진 시를 더 찾지 않았습니다.


정신없이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나면 이상하게도 학생이었던 때가 그리워집니다. 방학이 있고, 세상은 조금 더 단순하고,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온종일 함께 있던 시절이요. 그 그리움은 가끔 비뚤어진 채로 표출되곤 했는데, 제게는 책을 사 모으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직장에서 주는 복지 포인트로 원룸을 도서관으로 야금야금 바꿔나갔지요.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여가는 책들은 고급스러운 책장에 꽂혀서 저를 꽤 원망했을 것 같습니다. 읽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읽히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직장을 그만둔 다음에도 책을 사 모으는 버릇은 계속되었습니다. 책이 탐이 나 에세이 콘테스트에 나가 상품으로 책을 타오기도 하고, 길을 가다 책방이 보이면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치듯이 서점으로 들어가 홀린 듯이 책을 사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가 시집을 받는 대신 서평을 써서 SNS에 올리면 된다는 글을 인스타에서 보았을 때, 심지어 선착순 30명이라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이 책을 영영 놓치게 될 것만 같은 위기감을 주는 문구를 보고서, 예, 제가 바로 그 서평단이 되겠습니다, 하고 냅다 손을 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선착순 30명. 이미 다 끝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운 좋게도 서평단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톰한 갈색 봉투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사랑스러움을 눌러 담은 글씨로 제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셨더군요. 택배 봉투는 곧바로 버리는 게 원칙인 저지만 간만에 보는 동글동글한 글씨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신발장 옆에 빈 봉투를 세워 두었습니다. 아침마다 우연히 봉투가 눈에 들어오면 그 귀여움에 몸서리쳤습니다.


바다를 닮은 새파란 표지를 가진 작가님의 시집은 마치 여덟 살의 제가 썼던 공책처럼 얇았습니다. 한 손으로 드는 것이 불가능한 전공 서적에 익숙해져 있던 저는 아, 시집이라 그런가, 참 작네, 금방 읽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달콤한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이 카라멜 마끼야또를 홀짝이는 것 같고, 전공 서적을 읽는 것이 샷 추가에 시럽 없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 같다면, 시집을 읽는 것은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는 것과 같더군요. 카페인에 민감한 저는 에스프레소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만, 분명히 그런 느낌일 거라 생각합니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압축하는 데 재주가 없는 저라면 한 시상에 적어도 세 쪽은 써야 했을 겁니다. 속독에 익숙해져서 정신없이 굴러가려는 시선을 붙잡고, 시 하나를 읽고, 머릿속에서 그려 보고, 느끼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라면 이 단어를 이렇게 나열할 것인가? 이 문장을 이렇게 나눈 건 어떤 의도였을까? 무엇을 보았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 감정은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이 시선은 나와 어떻게 다른가?


읽으면 읽을수록, 뒤로 가면 뒤로 갈수록 더 고운 시가 많이 보였습니다. 간만이라 익숙하지 않은 시 읽기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겁니다. 마지막 시까지 전부 읽고, 다시 한번 처음부터 읽으면 또 다르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읽을 생각입니다. 제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좋다고 생각되는 시를 SNS에 올리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짜장면입니까 짬뽕입니까? 엄마입니까 아빠입니까? 더 심각한 문제는 80여 가지의 짜장면과 짬뽕, 80여 명의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아닌 다른 29명의 서평단 멤버들이 제가 즐거움을 느낀 시들을 잘 골라서 공유해주셨으리라 믿고, 정말이지 개인적으로 저에게 와 닿은 시 하나를 고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 시는 다른 29명의 서평단 멤버들이 아무도 고르지 않을 것만 같은 시입니다. 그것은 바로 맨 첫 번째 시, 시인의 말입니다.



펜촉의 벌어진 틈으로 흘러내리는 잉크는 죽은 내 아버지다.
 글을 짓는 일에 당신을 얼마든지 팔아도 좋다시던 내 아버지는 이제 내 만년필에 들어 산다. 시를 짓는 일은 아버지와 함께 집 하나를 지어 올리는 일이다. 내가 지은 시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다. 죽은 아버지가 단단한 벽돌을 지고 먼 길을 걸어온 발자국이 찍혀 있다.



저는 지난겨울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님은 시를 쓰시고, 저는 에세이를 씁니다. 작가님은 돌아가신 아버님과 함께 시를 쓰지만, 저는 아직 살아 계신 어머니와 함께 글을 씁니다. 제가 쓴 글에는 어머니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시인의 말을 읽고서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저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정원에 핀 식물들을 돌보는 글에는 어렸을 때부터 식물을 함께 돌보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겨 있고, 아이 셋을 키우는 윗집 사람과 층간소음에 대한 글에는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에게 혼나던 어린 시절이 적혀 있습니다. 오랜 세월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주섬주섬 주워 모은 제 단어를 윤기 나게 합니다. 또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작가님은 단단한 집 한 채 같은 시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따순 밥을 드시겠지요. 아직 허허벌판, 아니 들판에 가까울 제 글에서 저와 제 어머니는 함께 웃으며 햇살 아래에서 맨발로 춤을 춥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 시인의 말, 맨 첫 번째 시가 저에게 가장 큰 깨달음과 행복을 주었습니다. 말머리에 말씀드렸듯이 서평은 처음 써 보는지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식상하고 상투적인 인사말로 끝을 맺어보겠습니다. 서평단이 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좋은 시를 듬뿍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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