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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May 14. 2022

2022.05.14

어쨌거나 글을 쓰기로 했다.

최근 연희동을 꽤 자주 온다. 이곳엔 꽤나 유명한 바가 있다. ‘책바’,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곳이다. 대화는 권장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조용히 책을 마시거나 술을 읽는다. 사실 이전에 한번 여길 오려고 예약을 했다가 급하게 취소한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생긴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느라 그랬는데, 그런 자리가 늘 그렇듯 아무런 수확도 의미도 없어서 더 아쉬워졌지 뭐야. 그래서 부러 조금 무리해서 스케줄을 정리하고 다시 예약을 잡았다. 그게 오늘이다.

도시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꽃이 길가에 잔뜩 벌여 놓은 골목에서 왼쪽으로 한번 틀고, 철제 계단 아래로 기웃거리다 보면 유리창 너머로 책을 읽고 있는 실루엣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느 바와는 다르게 의도된 고요함이 느껴진다. 공기를 흔드는 것은 안쪽 냉장고 위 올려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혹은 쉐이커 흔드는 소리, 얼음 달그락거리는 소리 정도. 자리 안내도, 주문도 귓속말로 소근소근. 어쩌다 보니 예약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와버렸지만 다행히 문제없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책바를 간다면 바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더랬다. 안내문에도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는 걸 추천한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바에서 글을 쓴다는 게 낯선 일이긴 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하고 있다면 나도 어색함 없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서. 지난 3년간 길러온 조용하고 빠른 타이핑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보리라! 하지만 맙소사. 어디에도 노트북은 없었다…

메뉴판을 책 읽듯이 꼼꼼히 읽은 다음 꽤나 도수가 있는 칵테일 하나를 시켰다. 초록 이파리를 띄워 나온 칵테일 잔. 얼음에는 바 로고가 찍혀 있었다. 기념 사진을 찰칵찰칵 찍은 뒤 칵테일을 홀짝이며 책 읽는 틈바구니에서, 아잇 이것 참 쑥스럽지만,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하겠다 마음먹은 건 해야 하니까. 살짝만 갸우뚱해도 화면이 까맣게 가려지는 프라이버시 필름이 준 용기도 있을 테다. 밝기를 가장 어둡게 바꾸고, 모니터 각도를 최대한 내 쪽으로 기울인 다음 워드 파일을 켜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그래. 어쨌거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낯선 행동이지만 마치 수백번은 해 본 것처럼 행동하는 건 꽤나 재미있다. 의외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정말 어떤 일에 익숙한지 혹은 처음인지는 나만 알 일이다. 그저 나만을 위한 연기. 편안하게, 자신의 세계에 푹 빠진 것처럼. 누가 보면 바에서 책이라도 수십 권 써낸 작가처럼 보일 테다. 글쎄, 몰라, 아닐수도 있어…

얼마 전부터 브런치 어플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글을 다시 써 보이기로 마음먹고, 글을 다시 공개로 바꾼 다음부터인데, 그 동기는 빠르게 빛을 잃어버렸다. 글감이야 항상 마음 속 글 더미 밭에 수시로 심어두지만, 제대로 된 글 하나로 써 내기까지는 꽤 많은 힘과 용기가 필요하니까. 사랑은 언제나 힘과 용기를 주었다가 삽시간에 빼앗아간다. 

하지만 어쨌거나,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빼앗아간다고 해서 빼앗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최선을 다해 줄다리기를 해 볼 요량이다. 조용히 그리고 오래 계속 노리는 것, 놓지 않는 것, 잘 하는 거니까. 누가 더 질긴지 겨뤄 보자구, 망할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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