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합격 통지를 받은 날은 인생에서 쉽게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능력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마치 햇빛 아래 떡잎을 씩씩하게 펼친 새싹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하지만 행복한 예과 시절이 끝나고 본과가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썩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본과 3학년이 되어 병원 실습을 시작했을 때 주로 이 깨달음이 찾아오곤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느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아니 분명히 누구 하나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몰랐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의대에 입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 한 사람 몫을 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 겨우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는 없다는 것. 적어도 수십 명의 사람과 막대한 자본, 기술, 그걸 뒷받침하는 제도가 있어야 사람을 겨우 살릴 수 있을까 말까 라는 것.
병원 실습을 1년쯤 돌고 나면 이 두번째 깨달음에도 회의가 찾아온다. 정말 살릴 수 있는 것 맞나? 매일 죽는데? 중환자실에서, 응급실에서, 병동에서. 교수님들과, 수많은 의료진들이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럼 어디서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걸 볼 수 있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거지? 그때부터 길이 갈리기 시작한다. 역시 내과인 것 같아. 내 생각엔 외과인 것 같아. 나는 전혀 모르겠어, 나는 말하는 감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아. 얼른 일 시작해서 학자금 대출부터 갚을래. 나는 인턴 돌면서 좀 더 고민할래. 우리는 작은 깨달음을 움켜쥔 손을 서로에게 펼쳐 보이고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으로 미래를 비춰보려 애썼다.
그 중에서 나는 역시 흉부외과인 것 같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가서 직접 봐야지! 보건복지부에서 진행하는 「공공·지역의료인력 양성 관리 및 지원」 사업 중 특수·전문분야 실습 사업을 신청했다. 이 사업을 통해 서울대학교병원 본원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흉부외과 성인심장과 소아심장, 소아과 심장파트 실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초에 실습 사업에 참여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담회가 열렸는데, 우연히도 한 중증외상외과 교수님 옆에 앉게 되었다.
중증외상외과, 알고 있었다. ‘골든아워’를 몇 번이고 읽었는걸. 모든 걸 내려놓고 의전원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에 읽은 책이었다. 수험서가 아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까끌까끌한 현실에 지친 마음을 달래곤 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막연한 기억만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교수님께 여쭈었다.
중증외상의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교수님은 잠깐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절반은 내과, 4분의 1은 외과, 나머지 4분의 1은 응급의학과지. 내과? 중증외상의학이라는 이름 그 어디에도 내과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어째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리라 다짐했던 4학년 여름방학은 아주대학교병원 중증외상센터 실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매일 낮, 매일 밤, 어떤 환자를 만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교통사고도, 또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사람도. 아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가!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중증 외상 환자가 119를 통해 도착할 거라는 연락이 오면, T-bay는 환자를 받을 준비로 분주해진다. 환자가 침대로 옮겨지는 즉시 온 사방에서 뻗어 나온 손이 환자에게 달라붙는다. 병원에 도착한 후 CT를 찍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빠른 결정, 빠른 개입. 이 프로세스가 사람을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과였다. 정말 내과였다. 수술하는 시간보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각종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고 언제 제거할지 고민해야 했고, 주렁주렁 달려 있는 약물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공부해야 했다. 즐거웠다. 중환자 치료에 대한 최신 지견이 환자에게 적용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니! 교수님들은 끊임없이 환자를 위한 더 나은 방법을 고민했고, 거리낌 없이 다른 교수님들과 그 고민을 나누었다. 회진을 할 때는 영양사 선생님과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들이 함께했다. 말로만 듣던 ‘팀 의료’가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것은 의료진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환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수고를 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환자와 이야기를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 담당 의사 OOO입니다, 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문장이 실제로 활용되는 문장이었구나, 실제로 들으면 저런 느낌이구나, 하고.
다른 학교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수술을 참관하고, 기쁘게 T-bay로 달려가며 2주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습이 끝나갈 즈음에는 입을 모아 더 일찍 왔어야 했어, 그럼 한 번 더 올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언젠가 아주대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