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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Jan 23. 2021

난 보컬 부스러기예요

음악이 삶에 가까이 와닿았던 순간들이 또렷이 기억난다. 엄마, 아빠를 종알거리기도 전부터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틀어주는 조기교육의 시대, 집에는 거의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 즈음엔 알아서 LP판을 바꾸고, 바늘을 가만히 내려놓곤 했다.

 

가끔은 LP판 어디에서 듣고 싶은 노래가 시작하는지를 몰라서, 대충 중간쯤 바늘을 내려놓고는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이 노래가 그 노래인가? 다음 곡이던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처음부터 듣자. 음악을 앨범 통째로 듣는 버릇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클래식이었다. 파헬벨-캐논을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뒷부분 클라이맥스에서 새로운 세상을 맛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순간. 마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과외 학생에게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어주듯이. 차근차근 쌓인 악기가 모여 이루어내는 하모니. 몇 번이고 다시 들었는지 모른다. 들을 때마다 늘 새로워, 짜릿해….

 

CD에 있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부터는 캐논으로 시작해서 좋아하는 노래만 골라서 카세트테이프에 모았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지, 그 카세트테이프가 피아노 선생님이 듣고 공부하라고 준 귀한 모차르트 연주곡 CD를 녹음해둔 거란 .

 

두 번째는 체리 필터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나, 낭만고양이라는 노래가 그렇게 속 시원하고 좋을 수 없었다. 계속 들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땐 MP3가 없었다. 그럼 어쩌겠어. 우린 모두 스피커를 하나씩 들고 다니지 않던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노래를 계속 불렀다. 특히 어둑한 곳에서 밝은 바깥으로 놀러 달려 나갈 때나,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갈 때는 더 크게.

 

분노에 가득 찬 고등학생에겐 상을 대신 욕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픽하이와 리쌍, 드렁큰타이거를 사랑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가사를 외울 정도로. 연습장에는 수학 문제를 푼 흔적보다 노래 가사를 받아 적은 흔적이 더 많았다. 시험이 끝난 날엔 노래방으로 달려가 폭풍처럼 랩을 쏟아냈다. 그 덕분인지 아직도 어지간한 에픽하이 노래 가사는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느 날, 뮤지컬을 봤다. 지금은 12년 지기가 된 친구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에 날 데려갔다. 공연 전에 이미 노래를 다 외워버릴 정도로 DVD를 보고 또 보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가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학교 뒷동산 나무 위에 올라가 되는 대로 불러대기도 했다. 그리고는 마음속 욕망 하나를 깨달았다. 나도 저 노래를 부르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무대에 서 보고 싶다.

 


대학을 가면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다는 뻔한 말.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믿은 만큼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입학식 전날에 학교 밴드동아리를 찾아가서, 눅눅한 반지하 복도에 밴드동아리 선배를 관객으로 세워 두고 노래를 불렀다. 얼마나 어색하던지.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마치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날 밤처럼.


어느 날,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너희 학과 애 하나가 우리 밴드에 들어왔던데? 응? 누구? 알고 보니 한 달 전 새터에서 본 춤 잘 추고 끼 많은 친구였다. 퀴퀴한 반지하 복도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잘했다. 노래를 너무 잘했다. 예쁜 데다가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밴드 사람들 거의 모두가 그 아이를 좋아했다.


기타 둘, 베이스 둘, 드럼 둘, 키보드 하나, 보컬이 무려 셋이나 되는 우리 32기수 중에 중학교 때부터 밴드 경험이 있던 사람은 그 아이 하나뿐이었다. 몇 안 되는 여자 보컬 밴드 노래 경합에서 그 아이를 이길 수 없었고, 새로운 노래를 찾으니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곡이거나, 악기가 어려워서 악기파트 동기들이 난색을 보이는 곡이었다. 반대로, 악기 파트 동기들이 가져온 어려운 여자 노래 중 그 아이가 소화하지 못하는 노래는 없었다.


어느 날 공연을 위해 드럼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나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드럼 운반용 보컬 부스러기구나. 이 밴드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얹혀 가고 있구나. 2년 연속으로 참석했지만, 공연 세팅만 하고 단 한 번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행사장에서, 행사 담당자분은 다음 공연에는 꼭 노래를 불러 달라, 선생님의 노래가 듣고 싶다, 하셨다. 썩어들어가는 속을 보이지 않으려 활짝 웃으면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결국 그 행사장에서 노래를 부를 일은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진작 그만두는 게 더 현명한 처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무모하고 거침없었으며, 한번 좋아하겠다 마음먹은 것은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생각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자구! 두 귀로, 안쓰러운 눈빛으로, 온몸으로 느껴지는 수치스러움으로 못난 내 노래를 마주하며. 기관지에 호의적이지 않은, 먼지 쌓인 반지하 복도의 겨울 공기와 싸우며, 당연하게도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다 갈색 피 섞인 가래를 뱉으면서. 이러다 영영 목소리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결국 복도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날들 사이에서. 산산조각이 난 자존심, 자신감. 그 부스러기를 매일 애써 긁어모으다 창문 반쪽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스트레칭, 발성, 곡 따라 부르기, 합주, 마무리 연습. 혼자 하는 연습은 마치 깜깜한 방 안에서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껏 뻗은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더듬거리면서, 제발 이게 문고리이기를, 이걸 잡아 돌리면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가끔 높은 보컬 선배님이 오셔서 연습을 봐주시기도 했고, 가까운 선배들이 피드백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 이해하고 소화하는 것은 내가 해내야 할 숙제였다. 오래 사랑해왔던 음악은 여전히 행복을 주었지만, 동시에 고문과 다름없었다.
 
 

1학년이 끝나고, 이후 1년간 밴드 이름을 달고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기수인 활동대로 지내다 마지막 공연이 끝난 날이었다. 두 기수 위였던 기타 선배 하나가 활동대 졸업 기념으로 동기들 각자의 취향에 맞춘 밴드 앨범과 직접 쓴 손편지를 주며 이런 말을 했다. 미성아. 난 네가 그만둘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앉아 있네. 이게 어떤 의미일까?


항상 어려운 선배였다. 말도 길게 나눠 본 적이 없었고, 곡 검사 때 혼난 기억만 가득해서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정한 선물에 덧붙인, 전혀 다정하지 않은 말투로 툭 던진 그 말을 들으니 매일 ‘도망가지 않기’를 선택했던 치열한 마음이 인정받은 것 같아서 눈물이 슬쩍 흘렀다.


마지막 날 이후로 10년이 넘게 흘렀다. 좋은 보컬 선생님들을 많이 만난 덕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린 수많은 것 중 무엇이 정답인지 알게 되었다. 반지하에서 굴렀던 지난 2년보다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은 첫 2개월 동안 실력이 더 좋아졌다. 덕분에 대구 인디 밴드 보컬로 사람들이 길에서 알아보기도 했고, 작게나마 이름을 알리기도 했으며, 멋진 음악가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버티고 버틴 덕분에 얻은 것이 많았고, 마침내 지금은 음악에서 행복만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과정이 과연 옳았을까? 음악에 푹 빠져서,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까? 제 발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서도 훨훨 날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알 수 없을 노릇이다. 다음에 또 무언가를 죽어라 좋아하게 된다면 좀 더 편안하게 해내고 싶다.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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