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약자에게만 날을 세우는 병든 갑질에 대하여

by 하노이별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


1. 자본주의의 성채, 완벽한 미소를 팔아 구원의 증표를 얻다

매일 아침,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아해진다. 먼지 한 톨 없는 눈부신 대리석 바닥과 정수리로 쏟아지는 눈부신 샹들리에의 빛. 내가 하루를 보내는 백화점 명품관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질서가 흐르는 거대한 성채다. 나는 이 특별하고 제한된 세계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늘 묘한 자부심을 느낀다.

특유의 묵직한 가죽 냄새와 은은한 시그니처 향수가 마치 성전의 제단에 피어오르는 향처럼 공간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곳에서, 나는 완벽한 프로페셔널이 된다. 티끌 하나 없는 유리 진열장 너머로 수천만 원짜리 희귀 가방에 세속의 지문이나 체온이 닿을까, 나는 늘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받들어 모신다. 이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압도적인 숫자로 증명된 자본의 은총을 입은 소수만이 쟁취할 수 있는 고귀한 성물이니까. 나는 이 눈부신 피사체들을 선택받은 고객의 손에 가장 경건하고 빛나게 전달하는 사제라는 사실에 깊은 긍지와 만족감을 느낀다.

나를 지명해 찾아오는 VIP 고객들은 막대한 부라는 절대적인 권능을 두른 이 세계의 신들이다. 그들이 걸치고 온 자본의 아득한 위압감 앞에서, 그들의 까다로운 취향과 변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내는 것이야말로 내 최고의 능력이자 자부심이다. 때로는 그들이 오만한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신경질적으로 억지를 부려도 나는 전혀 타격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례함조차 그들이 가진 자본의 부피만큼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권능이라 여겼다.

한 번은 내 또래쯤 되는 젊은 VIP 고객이 자기가 원하는 한정판 색상을 구해주지 못했다며, 내 얼굴을 향해 영수증과 신용카드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적이 있다. 바닥에 흩어진 플라스틱 카드와 종이 쪼가리들을 줍기 위해 대리석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을 때,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면서 무슨 명품을 팔아?"라는 날 선 반말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 수치스러운 순간조차 내 입꼬리는 매뉴얼처럼 완벽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카드로 결제될 실적이 얼만데, 이 정도 감정 노동쯤이야 당연한 거지.' 나는 속으로 기민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바닥에 엎드린 채 조금도 흔들림 없는 가장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이 거대한 부의 질서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는 것이 훨씬 프로답고 지적인 방식이라 여겼다. 나를 짓밟는 거대한 돈의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납작 엎드리고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것. 나는 그것이 이 무겁고도 매혹적인 자본의 신전에서 가장 우아하게 살아남고 대우받는 법칙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지독할 정도로 완벽한 인내와 서비스의 대가로, 나는 이번 달 가슴에 금빛 ‘최우수 사원’ 배지를 달았고 꿈에 그리던 매니저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유니폼 깃에 훈장처럼 반짝이는 이 배지가, 마치 나를 더 높은 계급으로 이끌어줄 구원의 증표처럼 느껴졌다. 퇴근 전 거울 앞,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내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이 거대한 자본의 성채에서 살아남은 꽤 멋진 승리자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2. 거울 속의 괴물, 깍두기 국물에 목숨을 건 비겁한 폭발

퇴근 후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백화점 뒤편의 허름한 24시간 설렁탕집이었다. 하루 종일 수천만 원짜리 가방을 받들어 모시느라 곤두섰던 신경이, 펄펄 끓는 설렁탕 뚝배기 앞에서 겨우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다.

사건은 내 테이블로 다가온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한 작은 실수에서 시작되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노동에 피곤에 절어 파리해진 얼굴, 그리고 무거운 뚝배기가 담긴 쟁반을 나르기엔 한없이 얇고 위태로워 보이는 손목. 아이가 쟁반을 내려놓다 손이 살짝 미끄러졌고, 깍두기 접시가 부딪히며 붉은 국물 한 방울이 내 원피스 자락으로 튀어 올랐다.

새끼손톱 반의반만 한, 아주 조그마한 얼룩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혀를 한 번 차고 물티슈로 쓱 닦아내고 말았을 정말이지 사소한 일. 하지만 그 붉은 점을 본 순간, 낮 동안 명품관의 샹들리에 아래서 겹겹이 억눌러두었던 시커먼 감정들이 활화산처럼 터져버렸다.

"아니, 지금 장난해요?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

내 입에서 짐승 같은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식당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기 싫었다. 아이는 사색이 되어 낡은 앞치마 자락만 꽉 쥔 채 연신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파르르 떨리는 앳된 목소리에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내 안의 폭주하는 괴물은 여리디 여린 약자의 피 냄새를 맡은 것처럼 더욱 난폭해졌다.

"죄송하면 다야?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알아? 사람을 이따위로 취급하고 서비스가 그 모양이니까 평생 여기서 서빙이나 하고 살지! 당장 사장 나오라 그래!"

나는 기어이 주방에 있던 식당 사장까지 홀로 끌어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나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내 원피스에 튄 그 하찮은 깍두기 국물 자국을 마치 내 존재 전체가 모욕당한 엄청난 사건인 양 미친 듯이 광분하며 지랄을 떨었다. 결국 쩔쩔매는 사장에게서 세탁비 명목으로 빳빳한 현금 오만 원을 받아냈다. 사장 옆에 파리하게 질려 서 있는 고등학생 아이에게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똑바로 해"라는 훈계를 쏟아내고, 눈물이 섞인 억지 사과까지 기어코 받아내고 나서야 나의 기이한 폭주는 멈추었다.

식당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확 끼쳐왔다. 미친 듯이 널뛰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흥분으로 마비되었던 이성이 그제야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먹 쥔 손안에 꾸깃꾸깃 접힌 오만 원짜리 지폐가 이상하게도 뜨겁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내가 지금 고작 깍두기 국물 한 방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순간, 승리감이나 통쾌함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찜찜함과 죄책감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의 파르르 떨리던 얇은 어깨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내가 내 돈 내고 먹으면서 그 정도 항의도 못 해? 이건 손님으로서 당연한 권리잖아.'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애써 변명하고 합리화해 보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찰싹 들러붙은 불쾌함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찝찝하고 까끌거리는 입안을 헹궈내려 서둘러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식히며 무심코 거울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거울 속에 서 있는 건 당당하게 권리를 찾은 멋진 손님이 아니었다. 잔뜩 핏대를 세운 채, 나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을 쥐어짜며 알량한 화풀이를 해댄 초라하고 일그러진 삼십 대 후반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오늘 낮 명품관 바닥에 무릎 꿇은 나를 향해 카드를 집어던지며 벌레 보듯 모욕하던, 그 소름 끼치도록 오만한 VIP 고객의 얼굴이 내 표정 위로 완벽하게 겹쳐졌다. 갑질이라는 폭력을 속으로 그토록 경멸했으면서, 정작 가장 힘없고 만만한 상대를 만나자 나도 모르게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득해졌다. 찬물이 틀어진 세면대를 짚은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끄러움이 찬물처럼 정수리를 끼얹었다. 대체 나는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나는 왜 수천만 원짜리 가방을 두른 거대한 자본의 폭력 앞에서는 기꺼이 하녀를 자처하며 굽실거렸으면서, 고작 깍두기 국물 한 방울을 흘린 앳된 아이 앞에서는 폭군처럼 미쳐 날뛰었는가. 어째서 나는 내 삶을 짓누르는 진짜 부당함에는 철저히 눈을 감고 비굴하게 웃으면서, 이토록 옹졸하고 사소한 일에만 핏대를 세우며 분개하는가!


3. 병든 힘에의 의지, 약자가 약자를 짓밟는 노예도덕

거울 앞에서 마주한 낯선 수치심의 정체를 명확히 언어로 규명해 준 것은 철학자 니체였다. 니체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력과 본능을 가리켜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불렀다. 건강한 인간은 이 에너지를 스스로를 극복하고 삶을 창조적으로 개척하는 데 쓴다. 힘에의 의지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싶어 하는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망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가 억압당할 때 나타나는 기형적인 양상에 주목했다. 거대한 권력이나 폭력에 짓눌려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힘을 잃어버린 약자들, 그들의 내면에서 힘에의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아주 음습하고 병든 형태로 왜곡되어 내면에서 썩어 들어간다.

자신을 억압하는 진짜 강자 앞에서는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비굴하게 엎드리면서, 그 억울함과 원한(르상티망)을 속으로만 겹겹이 쌓아두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보다 더 약하고 만만한 대상, 반격할 힘이 없는 안전한 타깃을 발견하는 순간 그 썩은 에너지를 폭력적으로 배설한다. 약자를 무릎 꿇리고 짓밟음으로써 '나도 이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라는 가짜 우월감을 획득하려는 이 비겁하고 찌질한 권력욕. 니체는 이것을 강자의 도덕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노예도덕'이라고 명명했다.

이 담담하고도 서늘한 철학적 진단 앞에, 나는 발가벗겨진 채 서 있는 기분이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이 그토록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던 이유는 바로 그 병든 노예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채 안에서 완벽한 미소와 인내를 파는 멋진 프로페셔널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해 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무자비한 자본의 위압감 앞에서 내 고유한 인격과 자존심, 즉 건강한 '힘에의 의지'를 철저하게 거세당한 무기력한 약자일 뿐이었다. 수천만 원짜리 가방을 든 VIP들의 모욕 앞에서는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라며 맹목적으로 굴종했던 내가, 그 비참함을 보상받을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보다 더 낮은 계급, 나보다 더 힘없는 만만한 타인을 찾아 완장질을 하는 것.

설렁탕집에서 벌인 그 옹졸한 광극은 정의로운 손님의 정당한 권리 행사 따위가 아니었다. 앳된 고등학생 아이의 파리한 얼굴과 눈물, 그리고 빳빳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 나는 그 보잘것없는 전리품들을 쥐고서야 비로소 내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된 것 같은 알량한 착각에 취해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만만한 아이의 목을 조르며 내 존재감을 확인하려 했던 그 끔찍한 갑질은, 내가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힌 뼛속 깊은 노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거대한 왕궁의 횡포에는 침묵하면서, 50원짜리 기름덩어리 갈비에만 분개했던 김수영 시인의 한탄처럼. 나는 거대한 자본의 폭력 앞에서는 기꺼이 하녀를 자처하면서, 깍두기 국물 한 방울을 흘린 앳된 아이 앞에서는 폭군처럼 미쳐 날뛰었다. 나는 강자가 아니었다. 남을 짓밟아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병들고 초라한 노예에 불과했다.


4. 내 안의 우상을 깨부수는 망치질

무거운 문을 열고 좁은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화장대 거울 앞에 서서 핏기 없는 얼굴을 마주했다. 낮 동안 명품관의 샹들리에 아래서 나를 그토록 우아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던 유니폼은, 이제 보니 거대한 자본의 성채에 갇힌 노예의 수의처럼 초라해 보였다.

나는 니체가 말한 '망치'를 집어 들기로 했다. 니체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가짜 진리들을 '우상(Idol)'이라 부르며,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망치로 두들겨 부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 안에는 자본주의가 주입하고 내가 기꺼이 맹신해 온, 너무나도 거대하고 단단한 우상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향해 사정없이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부숴야 할 것은 내 가슴팍에서 오만하게 빛나고 있는 금빛 '최우수 사원' 배지였다. 나는 이 배지를 구원받은 자의 증표요, 언젠가 나 역시 저 화려한 성채의 주류로 편입될 수 있을 거란 허황된 믿음의 결정체라 여겼다. 수천만 원짜리 가방을 내 돈으로는 평생 가도 사지 못하면서, 그 막대한 부의 언저리를 서성이고 VIP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만으로 내 계급마저 상승했다고 착각해 왔다.

하지만 망치로 내리친 그 훈장의 실체는 참혹했다. 그것은 승리자의 트로피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자존심을 가장 값싸게 팔아넘긴 자에게 쥐여주는 '가장 번쩍이는 목줄'에 불과했다. 나는 무례한 절대자들의 변덕을 훌륭히 소화해 낸 지적인 프로가 아니었다. 그저 돈의 위압감에 짓눌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엄마저 비겁하게 포기해 버린 겁쟁이였다. '최고급 서비스'라는 허울 좋은 핑계 뒤에 숨어, 내 영혼이 병들어가는 것을 방치한 대가로 얻어낸 참담한 면죄부였다.

두 번째 망치질은 설렁탕집에서 쥐어짜 낸 그 얄팍한 우월감을 향했다. '돈을 쓰는 손님은 언제나 왕이며, 남에게 대접받아야만 내 가치가 증명된다'는 썩어빠진 보상심리. 거대한 자본의 신전에서 뺨을 맞고, 가장 만만한 약자에게서 눈물의 사과와 빳빳한 오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내며 나는 내 무너진 자존심이 회복되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 우상을 박살 내고 나자 끔찍한 민낯이 드러났다. 앳된 아이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던 나는 결코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자본의 계급장에서 얻어맞은 상처를 나보다 약한 아이에게 전가하며, 스스로를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의 괴물로 전락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그 옹졸한 횡포는 권리가 아니라, 뼛속까지 자본의 맹신도가 되어버린 자의 초라한 화풀이였다.

쨍그랑. 내 안에서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가짜 믿음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가슴에 달린 배지를 거칠게 떼어내 화장대 구석으로 던져버리자, 평생을 바쳐 맹신해 온 거대한 신전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과 혼란이 덮쳐왔다. 숨이 막혔다. 우상을 다 때려 부수고 난 뒤의 내면은 폐허처럼 고요하고 아득했다. 나는 대단한 프로페셔널도, 대접받아 마땅한 고귀한 손님도 아니었다. 그저 지독히 무기력하고 텅 빈 30대 후반의 평범한 여자, 그 초라한 맨얼굴만이 거울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평생을 의지했던 기둥이 사라진 이 텅 빈 무력감과 당혹스러움.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진통의 시간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철저한 폐허야말로 새로운 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하고도 단단한 시작점이었다. 가짜 계급장과 허위의식이 모두 무너져 내린 그 텅 빈 바닥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남의 시선에 갇히지 않은 진짜 내 숨을 쉬기 시작했다.


5. 우상을 부순 폐허 위, 일상의 초인으로 다시 서다

가짜 계급장과 허위의식이 모두 무너져 내린 그 텅 빈 폐허 위에서, 나는 비로소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억압적인 자본의 시대에 니체가 말한 초인(위버멘쉬)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흔히 초인이라고 하면 세상을 뒤엎는 거창한 혁명가나, 남들보다 압도적인 부와 권력을 거머쥔 무자비한 강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결코 타인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사람들이 맹신하는 낡은 우상을 스스로 깨부수고 그 텅 빈 바닥 위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라는 천박한 믿음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바깥의 잣대나 타인의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자. 남을 무릎 꿇려 자신의 알량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은 자존감이 텅 빈 노예들의 방식일 뿐이다. 진짜 초인은 타인을 짓밟을 필요가 없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든 이미 자기 존재 자체로 단단하게 서서 자신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텅 빈 도화지 위에 자기 삶의 규칙을 스스로 그려나가는 사람. 그것이 니체가 꿈꾼 초인의 진면목이다.

이 눈부신 초인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핏대를 세우던 흉측한 내 민낯과 가만히 겹쳐 보았다. 나는 그동안 강해지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비겁하고 처절한 길을 걸어왔던가. 수천만 원짜리 가방을 다루는 그 알량한 특권의식을 내 진짜 계급이라 착각하고, 거대한 권력에게 얻어맞은 뺨을 만만한 약자에게 화풀이하며 억지 우월감을 짜내는 삶.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철저히 자본에 길들여진 찌질한 노예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진짜 강해진다는 것은 그런 얄팍한 가짜 완장을 휘두르는 일이 아니었다. 백화점 명품관의 부속품으로 감정을 팔며 살아가는 30대 후반 여성이라는 나의 팍팍하고 초라한 현실을 도망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것. 그리고 돈이 매겨주는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나 스스로 내 일상의 존엄을 세워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닿아야 할 진짜 초인으로의 출발선이었다.

이 뼈아픈 자각 이후, 나는 비로소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완장과 억지스러운 프로의식을 내려놓을 용기를 얻었다. 명품관의 샹들리에 아래서 가방을 모시는 일은 여전히 내 생계지만, 더 이상 그 화려한 성채에 내 영혼의 구원까지 의탁하지는 않는다.

퇴근 후 퉁퉁 부은 다리로 동네 식당이나 편의점에 들를 때면, 내 앞에 선 고단한 아르바이트생의 얇은 손목과 파리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내 화풀이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오늘을 살아내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밖에서 억눌린 무기력함을 사소한 타인의 실수에 핏대를 세우며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옹졸하고 뾰족했던 에너지를 거두어들여 내 작고 낡은 방 안으로 온전히 쏟아붓기로 했다. 자본의 논리가 미치지 못하는 이 작은 공간에서, 나는 세상의 잣대가 아닌 나만의 규칙으로 삶의 가치를 다시 빚어내는 연습을 시작했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나를 반기는 네 살배기 고양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을 가만히 쓸어안는다. 수천만 원짜리 희귀 가죽이 뿜어내는 차갑고 서늘한 위압감 앞에서는 늘 숨을 죽여야 했지만, 내 손끝에 닿는 이 작고 따뜻한 생명의 심장 박동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작은 생명은 내가 얼마짜리 실적을 내는 사람인지,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 평가하지 않은 채 오로지 제 온기만으로 나를 온전히 긍정해 주기 때문이다.

조용히 식탁에 앉아 하얀 스케치북을 펼치고 맑은 수채화 물감을 붓에 머금는다. 이곳은 한 치의 오차나 흠집도 용납되지 않는 명품관의 숨 막히는 진열장이 아니다. 누군가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출 필요도, 억지로 완벽한 미소를 꾸며낼 필요도 없다. 하얀 도화지 위로 물감이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번지고 때론 엉망으로 섞여도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나는 내 팍팍하고 평범한 삼십 후반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껴안아 보기로 한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지가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이 정해준 무거운 계급장을 떼어내고 아이처럼 나만의 색깔에 흠뻑 빠져드는 이 순간만큼은 내가 내 삶의 완벽한 창조자이자 주인이다.

사소한 것에 핏대를 세우며 분개하던 병든 에너지는, 이제 내 일상의 아주 작고 흠집 난 것들조차 깊이 사랑하는 힘으로 바뀌었다. 남을 깎아내려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돈의 액수로 우월감을 짜내지 않아도, 텅 빈 도화지 위에 나만의 색을 칠해가는 내 삶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예술이다. 니체가 말한 내 운명을 사랑하는 법, 아모르 파티는 이렇게 아주 작고 고요한 나의 방에서 가장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6. 자본주의의 먹이사슬을 끊고, 우리는 함께 초인이 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이 병든 굴종과 분노는 비단 화려한 명품관에서 일하는 나 개인만의 찌질한 문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자본의 계급장 앞에서 매일 조금씩 굴복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대한민국,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는 더 돈 많은 사람, 더 권력 있는 사람에게 뺨을 맞고 비굴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왕궁의 횡포 앞에서 억눌린 수치심은 고스란히 나보다 약한 사람을 향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식당의 앳된 알바생에게, 아파트 경비원에게, 배달원에게, 콜센터 직원에게. 이 지독한 갑질의 먹이사슬 속에서 우리는 번갈아 가며 비참한 노예가 되고, 또 번갈아 가며 잔인한 괴물이 되어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신전에 포획된 우리가 이 병든 갑질을 멈추고 함께 초인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밖으로 향하던 분노를 멈추고, 나와 똑같이 억압받는 타인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데 있다. 식당 알바생의 얇은 손목과 고단한 어깨에서 명품관 바닥에 엎드렸던 나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그 사람 역시 돈의 논리로는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존엄을 가진 주체임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흘러내린 비열한 폭력의 사슬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대에서 단호하게 끊어내는 용기. 그것이 우리가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함께 초인으로 연대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김수영 시인의 처절한 고백처럼,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자본 앞에서는 모래나 먼지처럼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일지 모른다.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화풀이하던 시인이나, 명품관 VIP에게는 못하고 설렁탕집 알바생에게 지랄을 떨던 나나, 그 옹졸하고 비겁한 본성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작고 초라함을 부끄러워하며 솔직하게 끌어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먼지나 모래로 흩어지지 않는다. 각자가 온전히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일상을 예술로 가꾸고, 내 곁의 타인 역시 당당한 초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1원 때문에, 50원짜리 갈비의 비계 때문에, 깍두기 국물 한 방울 때문에 분개하는 옹졸한 괴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본이 매겨준 가짜 계급장을 다 떼어버린 텅 빈 폐허 위에서, 작지만 단단해진 연대의 손을 잡고 나와 당신은 함께 진짜 삶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물고 물리는 이 갑질의 더러운 먹이사슬을 누구도 아닌 내 선에서 단호히 끊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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