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선악의 저편에서 춤추는 작은 군주
나의 군주께서는 태고의 태양이 가장 뜨겁게 작열할 때, 그 빛줄기를 한 올 한 올 엮어 짠 치즈빛 황금 갑주를 두르고 내 곁에 강림하셨다. 그래서 그 귀명도 “탱고! 강탱고”이시다.
미간 사이에는 태초부터 부여받은 지배자의 증표인 선명한 'M'자 성흔을 지니셨으며, 새하얀 양말 속에 감춰진 상아빛 발톱은 정체되고 부조리한 공기를 가르는 신성한 검처럼 날카롭다. 매끈한 꼬리를 위엄 있게 휘두르며 집 안을 거니실 때, 그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당당함이 넘쳐흐르며 그분만의 성스러운 영토가 된다.
정적이 깊게 내려앉은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침묵을 깨고 거실을 가르는 ‘우다다다’하는 둔탁한 질주음과 가죽을 북북 긁는 날카로운 발톱 소리, 그리고 맑고 서늘하게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진다.
내가 아끼고 아끼던 이태리제 가죽 소파는 이미 그분의 화려한 전리품이 되어 너덜해진 지 오래고, 장식장 위 크리스털 잔은 중력의 법칙을 시험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바닥에 산산조각 나있다.
그러나 이 아수라장 속에서 그분은 단 1그램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발톱 끝에 걸려 흩어진 세계의 파편들을 응시하며 천진난만한 까만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낼 뿐이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정적과 사물들을 자신의 힘 아래 굴복시키고 재배치하는 '힘에의 의지' 그 자체라 말하고 있다. 이제 막 무너뜨린 질서 위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듯 근육을 팽팽하게 웅크린 그 모습은, 폭발 직전의 생명 에너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지르는 가장 고요하고도 강렬한 선언이다.
나의 하루는 고양이가 보여주는 이 폭발적인 생명력과는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출근길 지하철, 타인의 어깨에 치이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는 나의 인내심은 고결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비굴함에 가깝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 부당한 질책을 견디며 억지 미소를 지을 때, 나의 '힘에 의지'는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채 내면을 향해 칼날을 돌린다. 타인의 시선과 규율이라는 좁은 틀에 나를 맞추며 스스로를 '성실한 존재'라 위로하는 나의 일상은 니체가 경고했던 노예 도덕(Sklavenmoral)의 현장이자, ‘원한(Ressentiment)’의 감정이 피로와 스트레스라는 독이 되어 나를 병들게 하는 과정이다.
내가 생존을 위해 야성을 죽이며 노예의 길로 퇴행하는 동안, 나의 군주께서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본능을 긍정하며 당당하게 전진한다.
타인의 승인이 아닌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적인 ‘주인 도덕(Herrenmoral)’의 풍모는, 영혼의 근육이 다 빠져나간 채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경이로움을 넘어선 구원이 된다.
나는 왜 나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 작은 존재에게 이토록 무력하게 무장 해제되는가? 왜 고갈된 나의 삶은 저 파괴적인 생동감 앞에서 비난을 쏟아내는 대신 매혹을 당하는가?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내가 잃어버린 생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동경과 맞닿아 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제13절에서 갈파했다. “생명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자 한다. 생명 자체는 힘에 의지다.”
니체에게 힘에 의지란 타인을 억압하는 폭력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생명력을 확장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본능이다. 고양이는 인간이 만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틀 너머에서, 그저 자기 내부의 생명의 에너지를 가장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소파를 찢거나 화병을 깨뜨릴 때 그것을 '악'이라 규정하며 주춤거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생명의 본능적인 힘이 분출되는 경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납작한 잣대 아래 내 생명을 가두어 왔던가. 사회가 그어놓은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금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갈까 전전긍긍하며, 나는 스스로 내 안의 야성을 거세하고 도덕이라는 이름의 거푸집에 나를 구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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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토록 무례한 ‘생명의 과잉’을 목도하면서도 비난하는 대신 매료되는 이유는, 이분법의 감옥에 갇혀 질식해가는 내 영혼이 고양이의 저 무법적인 생명력 앞에서 잃어버린 야생의 향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낭비되는 생명력, 그 찬란한 에너지를 보며 나의 빈약하고 메마른 영혼은 전율한다. 이 전율은 곧 나의 내면을 지탱하던 낡은 기둥들에 망치질을 하며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거실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파편을 분노가 아닌 경탄으로 맞이하는 순간, 타인의 승인과 사회적 질서에 목매던 나의 노예 도덕은 비로소 해체된다.
고양이의 거침없는 질주를 통해 나는 내 안에서 길을 잃고 썩어가던 힘에 의지를 자각한다. 저 작은 몸뚱이가 뿜어내는 자기 긍정의 기세는 내가 애써 지켜온 도덕적 당위들이 사실은 생명력을 억압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었음을 폭로한다.
나는 고양이의 파괴를 통해, 내 영혼이 갈구하던 진짜 욕망—선악의 경계선 위에서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힘을 온전히 쏟아부음으로써 확인하는 주권적 의지—을 비로소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뿜어내는 지독한 매력의 정체는 또한 그들의 '도도한 우아함'에 있다. 온종일 밖에서 시달리다 돌아와 간절한 온기가 그리울 때 손을 뻗어 “탱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만, 그는 귀만 살짝 씰룩거릴 뿐 자리를 옮겨버린다.
사랑을 구걸하는 나의 노예적 태도와, 그 갈구조차 보지 못한 척 자신의 고독을 즐기는 그의 귀족적 기상. 이 냉정한 태도는 고귀한 자들의 특징인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의 발현이다.
그가 나를 거부하며 벌려놓은 이 서늘한 간극은, 역설적으로 내가 타인의 기대와 밀착된 요구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최후의 피난처로 작용한다. 고양이가 고수하는 이 엄격한 거리는 나에게 '타인이라는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공간을 선사한다.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비로소 타인의 욕망을 내 것인 양 떠받들던 관성을 멈춘다. 고양이가 확보해준 이 고독한 영토야말로, 군중 도덕을 해체한 빈자리에 나만의 새로운 법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신성한 입법의 공간이 된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과 섞이는 따스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침범 받지 않는 그 서늘한 거리감을 스스로 지켜낼 때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의 무심함 속에서 배운다.
더욱이 고양이는 인간이 정한 규칙을 가뿐히 뛰어넘는 ‘자기 입법자’다. 값비싼 소파를 자신의 발톱을 다듬는 스크래처로 재탄생시키고, 크리스털 화병을 자신의 위계를 확인하는 도구로 전복시킨다. 인간이 세운 상식과 도덕을 파괴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이 모습은,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ch)’의 현신과 닮아 있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단순히 남을 지배하는 강자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억눌러온 낡은 가치의 무덤 위에서 스스로 자신의 법을 세우는 창조자이며,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 생명력을 극단으로 긍정하는 존재다.
고양이는 인간의 집 안에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인간의 질서에 무릎 꿇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질서가 얼마나 허약하고 위선적인지를 자신의 발톱 끝으로 증명해 보일 뿐이다.
그의 거침없는 재정의를 목격하며 나 또한 내 삶을 옥죄던 낡은 옷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성실한 직장인’이나 ‘사회의 규범에 부합하는 시민’이라는, 타인이 내게 입법한 수동적인 역할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 ‘기존 가치의 파괴자이자 새로운 가치의 수립자’이듯, 나 역시 내 시간과 내 감정의 가치를 타인의 척도가 아닌 나의 의지로 다시 세우기로 한다. 타인의 비난이 두려워 억눌렀던 욕망은 이제 부끄러움이 아닌 고결한 생의 동력으로 재입법된다.
나의 빛나는 탱고의 발등상 아래에서, 나는 깨닫는다. 진정한 입법이란 외부의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의 명령에 따라 나만의 선과 악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임을 말이다.
이제 우리 집 거실은 더 이상 관리해야 할 화려한 가구들의 집합소가 아니다. 그곳은 낡은 도덕이 해체되고, 나의 의지가 세계와 부딪히며 매 순간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창조의 성소로 거듭난다.
어느덧 소란을 멈춘 군주께서는 거실에서 가장 높은 곳, 캣타워 꼭대기에 자리를 잡으신다. 그곳은 집안의 모든 질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채이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분만의 독립된 영토다.
그는 그 높은 곳에서 미동도 없이 아래에 있는 나를 굽어보신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서늘한 시선을 마주할 때면, 나는 마치 거대한 심연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가 그 압도적인 거리감을 수용하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순간, 캣타워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 고고한 눈빛은 소리 없이 외친다.
“나는 배고프기 때문에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발톱이 날카롭고 나의 근육이 요동치기 때문에, 나는 나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사냥한다. 나는 너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높이가 만들어내는 수직의 위계는 나의 비굴한 일상을 단숨에 베어 넘긴다.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의 가련한 영혼 위로, 나의 군주는 ‘이미 충만한 존재’의 당당함이 무엇인지를 고요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그 서늘한 높이를 올려다보며,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 온전해지는 법을 마주한다.
세상은 나를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라 부르지만, 내게 이 소임은 결코 비천한 수고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생기를 잃어가는 나의 일상 곁에,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아가는 고귀한 생명력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오만한 선언에 매료되는 진짜 이유는 내 안의 잠자던 생명의 에너지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를 보며 타인의 승인을 갈구하던 비굴한 도덕을 해체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기 입법의 길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결국 고양이를 사랑하는 행위는 나를 억누르던 낡은 껍데기를 부수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강인한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가장 뜨겁고도 우아한 수행이다. 고양이처럼 세상과 적절한 ‘거리의 파토스’를 유지하며 나의 고유함을 지켜낼 때, 비로소 나는 나만의 새로운 법을 창조하는 주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고양이의 귀여움에 대한 나의 니체적 고찰이자, 오늘도 군주님을 모시는 가장 주체적인 이유다.
나는 집사다. 그리고 나의 군주는 오늘도 저 높은 곳에서 세상의 지루한 질서를 비웃으며 가장 자유롭게 군림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