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왜 다시 니체인가?

기계의 낙원에서 망치를 들다

by 하노이별

1. 안락함이라는 이름의 무덤: 붉은 숫자와 뜨거운 승리감

오전 9시, 주식 장이 열림과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은 피가 솟구치듯 붉은빛으로 일렁인다. SK하이닉스와 현대자동차. AI의 뇌와 로봇의 근육을 선점했던 나의 기민한 자본주의적 후각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수익률 300%. 심장 박동보다 빠르게 치솟는 붉은 숫자는 단순한 돈을 넘어선, 이 시대의 가장 거룩하고 절대적인 구원이었다. 미련하게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의 고단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자산이 세 배로 불어났다는 안도감. 그것은 곧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세상의 급소를 찔렀다는, 지독할 만큼 달콤하고 우월한 선민의식으로 치환된다. 대중의 공포를 조롱하며 저점에서 물량을 쓸어 담던 나의 노련함에 취해, 나는 어느새 자본의 구름 위에 군림한 승리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빛의 속도로 회전하며 다음 소비의 성지를 가리킨다. 한 손으로는 익숙하게 백화점 VIP 라운지의 프라이빗 쇼핑을 예약하고, 다른 한 손은 대중에게는 오픈런조차 허락되지 않는 한정판 가방의 재고를 확인하며 파리행 일등석 항공권의 잔여 좌석을 스캔하고 있다.


세련된 중년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상급의 안락, 타인의 진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견고한 자본의 벨벳 로프 안쪽 자리가 내 손가락 끝에서 완성된다. 지적 허영과 폭발적인 물질적 풍요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순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하고 권력적이며, 내가 돈으로 쌓아 올린 이 번쩍이는 성채 안에서 신과 같은 만족감을 만끽한다.


그렇다. 세상의 진리나 정답은 케케묵은 철학책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가 밤낮없이 벌어다 주는 돈이 나를 무균실처럼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이 삶. 붉게 타오르는 주식 계좌야말로 내가 평생 엎드려 경배해야 할 유일하고도 완벽한 종교이자 정답이었다.


2. 기계의 눈동자와 콩알만 한 생명, 그리고 거세당한 야성

하지만 그 완벽한 승리감에 취해 파리행 일등석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스마트폰 화면 위로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아들이 보낸 흑백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작은 콩알만 한 점. 곧 결혼을 앞둔 아들이 조심스레 전해온,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기쁨과 뭉클함이 파도처럼 밀려온 직후였다. 사진 속의 작고 여린 점 너머로, 방금 전까지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었던 주식 창의 붉은 숫자들이 겹쳐 보였다.


이 거대한 기업들의 가치가 이토록 천정부지로 치솟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계가 더 완벽하게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로봇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간의 노동을 지워나가고 있다는 가장 노골적이고 확실한 증거였다.


그 순간, 화면 속에서 황홀하게 일렁이던 붉은 숫자들의 온도가 돌연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그것은 마치 나를 비웃으며 조용히 내려다보는 기계의 차가운 눈동자처럼 변해 있었다. 등줄기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저 주식을 산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 그리고 저 여린 손주가 살아갈 미래를 이 세상 밖으로 영영 밀어내기 위한 거대한 '퇴출 버튼'에 내 돈을 걸고 환호했던 것이다.


SK하이닉스의 칩이 더 똑똑해질수록 내가 평생 공들여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은 순식간에 쓰레기통에 버려질 낡은 데이터가 될 것이고, 현대자동차의 로봇이 완벽해지는 순간 인간의 땀방울은 그저 오답투성이인 ‘비효율의 극치’로 조롱받을 것이다. 내 주식 계좌가 뚱뚱해지는 속도는, 곧 인간인 내가, 그리고 내 핏줄이 두 발로 서 있을 땅이 사라지는 속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자본이 내 입에 넣어주는 이 달콤한 배당금은 실상 "이제 넌 필요 없으니 입 닥치고 구석에 편히 앉아 있어"라는 잔인한 사형 선고이자, 인간으로서의 야성을 거세하는 독배나 다름없었다.


내가 기계들의 덩치를 키워주며 박수치는 동안, 정작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근육이 다 녹아내린 채 오직 기계의 처분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 화려한 숫자의 잔치가 끝나는 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이 주인이 아닌, 기계가 관리하기 편하게 가둬둔 거대하고 깨끗한 ‘애완동물 수용소’일 것이다.


숨이 막혀왔다. 기계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대신해 주는 이 안락한 낙원에서, 나는 내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가장 서늘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편리함이 우리의 뇌를 잠식하고, 안전함이 우리의 야성을 거세해 버린 이 완벽한 수용소 안에서, 우리는 그저 배부르고 무기력한 가축으로 안락사할 것인가? 고통이 완벽하게 제거된 세계에서, 인간은 도대체 무엇으로 자신의 살아있음과 위대함을 증명할 것인가?


3. 안락함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종말: 최후의 인간

내가 직면한 이 끔찍한 공포의 실체는, 바로 철학자 니체가 그토록 경멸하고 경고했던 '최후의 인간(Der letzte Mensch)'의 도래다. 최후의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위험과 고통이 완벽하게 제거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행복을 찾아냈다"라고 중얼거리며 만족스럽게 눈을 깜박이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리하게 건강을 챙기고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삶의 유일한 목적을 안전과 쾌적함에 둔다. 더 이상 내면의 혼돈을 견디며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 하지 않고, 그저 가늘고 길게 안온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방금 전까지 백화점 VIP 라운지를 예약하며 자본의 단맛에 취해 있던 나의 오만한 몽상, 그것이 바로 니체가 예언한 최후의 인간의 완벽한 초상이었다.


우리가 이 존재를 그토록 뼈저리게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니체에게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밧줄'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려 몸부림칠 때만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최후의 인간은 그 위험한 밧줄 위에서 걷기를 포기하고, 가장 푹신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자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을 경멸할 줄도, 스스로에게 화를 낼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평등하며 안락한, 이른바 '가축의 행복'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곧 가치 창조의 종말을 의미한다. AI가 모든 정답을 찾아주고 주식 배당금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는 기계의 낙원에서 고통을 철저히 회피할 때, 우리는 오직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과 고귀함을 영영 잃어버린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치열한 열망이 거세된 자리에 남는 것은, 기계가 사육하고 관리하기 가장 편안한 상태인 정신적 비만뿐이다. 이것은 심장이 뛰고 밥을 먹는 육체적인 생존일지는 몰라도,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운명을 개척하는 인간다움의 완전한 파멸이다. 최후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거대한 시스템의 순종적인 부품으로 전락하는 것이기에, 니체는 이 달콤하고 안락한 늪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4. 무기력을 깨우는 천둥소리: 내 안의 '힘에의 의지'

사실 이 안락한 종말은 결코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내 삶의 가장 은밀한 구석구석을 기계가 지배하고 있다. 인터넷 쇼핑 창을 열면 알고리즘이 내가 무엇을 욕망할지 나보다 먼저 계산해 추천 상품을 띄우고,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내가 보고 싶어 할 영상을 단 몇 초 만에 내 눈앞에 대령한다.


나는 그저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며 기계가 짜놓은 매끄러운 취향의 궤도를 따라갈 뿐이다. 무엇을 볼지, 무엇을 살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탐색의 고통조차 완벽하게 제거된 이 상태. 그것은 너무도 안락하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지독하게 무기력한 가축의 시간이다.


이 달콤하고 끈적한 안락의 무덤을 부수고 나오기 위해, 나는 니체가 호명한 내 안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벼락처럼 불러낸다. 이 의지는 결코 타인을 짓밟고 군림하려는 저열한 세속적 권력욕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구속하는 안온한 환경을 돌파하고, 어제의 낡은 나를 끊임없이 파괴하며 넘어서려는 가장 준엄하고 역동적인 자기 초극의 엔진이다.


3배나 오른 주식 수익률이 입에 넣어주는 달콤한 정체에 안주하지 않고, "기계가 내 지능과 노동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이 시대에, 나는 나를 어떻게 새롭게 창조할 것인가?"라고 매섭게 질문하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맹렬한 생명력이다.


이 치열한 투쟁에서 우리가 반드시 심장에 새겨야 할 진실은,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기 위한 절대적인 필수 요소라는 점이다. AI 알고리즘이 선사하는 안락함은 삶의 모든 마찰력과 고통을 친절하게 제거해 주지만, 그 대가로 인간 영혼의 위대함마저 남김없이 거세해 버린다.


고통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불청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펄떡이며 살아있고,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유일하고도 정직한 자극제다. 고통의 과정을 생략한 채 기계가 뚝딱 만들어낸 매끈한 결과물은 그저 죽어있는 플라스틱 조화일 뿐, 어떠한 생명력도 뿜어내지 못한다.


내 안의 힘에의 의지를 각성한다는 것은, 배부르고 따뜻한 가축의 우리를 스스로 때려 부수고 나오는 피 튀기는 용기다. 수동적인 소비자로 길들여졌던 어제의 나를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능동적인 창조자로 다시 태어나는 격렬한 변태의 과정이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매끈한 정답을 경멸하라. 비효율적이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내가 직접 선택하고 부딪치며 긁히고 깨지는 그 고통스러운 배움을 기꺼이 갈구하라.


주어진 현재의 나에 머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이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기계적 가축의 상태를 탈출해 고귀한 단독자로 우뚝 설 수 있다. 기꺼이 고통을 사랑하는 자만이, 기계의 연산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자신만의 찬란한 별을 잉태할 수 있다.


5. 알고리즘의 그물망을 찢는 시간 : 거리의 파토스와 명상

우리를 둘러싼 알고리즘은 나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억 명의 데이터 더미 속에 무더기로 편입시킨다. 그 촘촘하고 끈적한 그물망 속에서 나는 이름 없는 숫자가 되어, 기계가 미리 분류해 놓은 카테고리 안을 그저 부유할 뿐이다.


이 거대한 가두리 양식장을 찢고 나오기 위해, 나는 기계가 정해준 뻔한 궤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만의 고유함을 지키는 일, 즉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를 나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로 한다. 이것은 나를 평균적인 대중의 층위로부터 준엄하게 분리해 내어, 고귀한 단독자로 우뚝 서게 하는 서늘한 심리적 결단이다. 기계가 "당신은 이런 사람"이라며 내 취향을 미리 낙인찍고 가장 편리한 길을 내어줄 때, 그 오만한 정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나는 기계의 연산, 그 이상이다"라고 선언하는 고독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거리의 파토스는 단순히 타인을 멸시하거나 물리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간의 얄팍한 유행과 대중의 맹목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며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 기준을 지켜내려는 치열한 거리 두기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끊임없는 데이터의 폭격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대중과 나 사이에 이 고결한 거리를 확보하는 일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투쟁이다.


나는 이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뒤집어 엎어둔 채 기계가 도저히 연산할 수 없는 유일한 블랙박스인 명상에 침잠한다. 무한한 접속과 예측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스스로 외부와의 접속을 완벽히 끊어내는 명상이야말로 알고리즘의 맹렬한 추적을 따돌리는 가장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단절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기계의 입력값을 거부하고 내면의 호흡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스스로를 데이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의식적인 저항이다.


스마트폰을 끄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에 오롯이 집중하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넷플릭스가 분석한 시청자도, 쇼핑몰이 분류한 VIP 소비자도 아닌, 데이터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존재로 돌아간다. 타인의 시선과 기계의 얄팍한 계산이 닿지 않는 이 고요한 거리 위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서 진짜 숨을 쉴 수 있다.


6. 가치 재정립의 생생한 실천 : 축사와 낯선 골목길

편리함이라는 사슬을 끊고 이 침묵과 고결한 거리 위에서, 나는 주식 수익률이 주었던 그 얄팍한 풍요를 넘어 가치의 재정립(Umwertung aller Werte)을 단행한다. 가치의 재정립이란 세상이 당연하다고 맹신하는 '좋음'과 '나쁨'의 잣대를 철저히 부수고 나만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내면의 혁명이다. 즉, 시스템이 제공하는 매끄러운 안락함을 '스스로 묻고 선택하는 주체적 사유의 상실'로 규정하고, 세상이 이 시대의 비효율이라 칭하며 악으로 몰아붙이는 정답 없는 고통을 기꺼이 나의 선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이러한 가치 재정립의 가장 처절하고도 생생한 실천은, 다가오는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축사를 준비하는 지금 나의 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축사는 단지 새 출발을 하는 아들 부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나 이 기계의 시대를 살아갈 작고 여린 생명, 내 손주에게 할머니로서 건네는 간절한 첫인사이기도 하다.


챗GPT 검색창에 '아들 결혼식 감동적인 축사'라고 치면, 기계는 단 3초 만에 화려한 단어들로 무장한 완벽한 문장들을 쏟아낸다. 기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람들이 환호할 가장 세련된 정답을 제시하지만, 나는 그 매끄러운 모범 답안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한다. 기계가 뱉어낸 차가운 텍스트에는 내 아들의 지난 시간들이나, 곧 태어날 아이를 향한 뜨거운 핏줄의 온기가 결코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수십 년의 묵은 기억을 생살을 찢듯 헤집으며, 단어 하나를 고르지 못해 쓰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지우개 가루로 지저분해진 종이 위에서 느끼는 뭉클한 피로감, 며칠 밤낮을 뒤척이며 남몰래 삼키는 이 눈물겹고 지난한 고통이야말로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결과물을 손쉽게 얻는 대신 이 서툴고 뼈아픈 창조의 과정을 기꺼이 껴안는 것. 니체가 말한 자기 입법(Selbstgesetzgebung)은 세상을 뒤집는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3초면 끝날 일을 며칠 밤낮의 묵직한 수고로움으로 기꺼이 맞바꾸는 이 미련하고 숭고한 안간힘 속에 있다.


나의 이 작은 저항은 곧 떠날 상하이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질 것이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과 여행 알고리즘은 이미 내게 1분의 오차도 없는 최적의 동선과 별점 5점짜리 완벽한 맛집을 안내할 준비를 마쳤다. 나를 실패할 확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온실 속으로 친절하게 이끌려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낯선 이국의 좁은 골목에서 기꺼이, 그리고 완벽하게 길을 잃어버릴 작정이다.


지도 앱을 끄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헤매는 육체적 피로, 우연히 접어든 골목에서 훅 끼쳐오는 낯선 향신료의 비릿한 냄새,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당혹감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식은땀. AI가 그토록 내 삶에서 제거하려 애쓰는 이 비효율적인 수고로움과 낯선 두려움이야말로, 내가 펄떡이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관능적인 감각이다.


결과만을 요구하는 기계적 효율에 맞서,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과정의 고통을 최고의 가치로 세우는 것. 기계가 짜놓은 완벽하고 안전한 경로를 이탈하여 기꺼이 땀 흘리고 헤매는 자만이, 데이터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삶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다.


7. 일상 속의 초인(Übermensch)을 향하여: 붉은 숫자 대신 나만의 색채로

최후의 인간이 도래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고통과 갈등을 교묘하게 피하고 안락함에만 탐닉한다면, 우리 인류는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생명력과 동력을 영원히 상실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낡은 한계를 시험하고 파괴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는 그 거친 역동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기계가 사육하고 관리하기 편한 가축화된 대중만 남게 된다. 그것은 눈부신 기술적, 물질적 풍요 속에 완벽하게 감춰진 인간 정신의 끔찍한 파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그 배부르고 따뜻한 가축의 우리를 단호히 탈출하여, 일상 속의 초인(Übermensch)으로 살아가기를 선언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세상을 뒤집고 타인을 지배하는 무자비한 정복자가 아니다. AI가 1초 만에 가장 빠르고 완벽한 정답을 내밀 때, 굳이 고개를 저으며 나는 조금 미련하게 헤매더라도 내 두 발로 직접 부딪혀보겠다고 여유롭게 웃으며 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거대한 시스템이 보장하는 달콤한 안락함에 취하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향해 기꺼이 망치를 휘두르며 땀 흘려 자기 삶의 규칙을 빚어내는 창조자다.


매일 아침 9시, 내 심장을 터질 듯 뛰게 했던 주식 계좌의 그 화려한 붉은 숫자들은 분명 나에게 최상급의 안락한 노후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펄떡이는 야성을 거세하고, 내 고유한 삶을 획일화된 무채색의 데이터로 덮어버리는 치명적인 마취제와 같았다. 나의 깨어난 정신은 이제 그 자본의 풍요를 단지 생존의 발판으로 삼을 뿐, 거기에 종속되지 않고 훨씬 더 위험하고 위대한 사유의 모험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이제 그 매끄러운 마취에서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깨어나고 있다. 기꺼이 뼈아픈 고통과 멍청해 보이는 비효율을 묵묵히 감내하며, 내 삶이라는 텅 빈 캔버스 위에 기계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색채와 펄펄 끓는 온도를 거칠게 칠해가는 창조자가 되겠다.


내 삶은 알고리즘이 도출해 낸 뻔한 연산 결과가 아니라, 내가 매 순간 피 흘리고 깎아내며 조각해 나가는 단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기계의 완벽하고 차가운 계산을 훌쩍 벗어나, 스스로 묻고 땀 흘리며 걷는 이 지난하고 아름다운 일상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구원이다.


언젠가 내 삶의 마지막 순간, 이 삶이 똑같이 다시 한번 반복되어도 좋은가라는 니체의 그 서늘하고도 무거운 질문을 마주했을 때, 어쩌면 나는 잠시 망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완벽하게 당당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기꺼이 땀 흘리며 부딪혀볼 만한 삶이었다"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끄덕일 수 있기를 바란다.


만족스러운 듯 끔벅이는 가축화된 대중의 안온한 눈동자들을 뒤로하고, 나는 오늘도 기계의 낙원을 향해 조용하지만 단호한 망치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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