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을 깨뜨린 자리에 고양이가 앉았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갈무리하며 창밖을 봅니다. 세상은 여전히 견고한 '안정'과 '효율'의 논리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여전히 타인의 속도에 맞춰 끝없는 사막을 걷는 '낙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역시 이 책을 썼다고 해서 내 삶의 모든 숙제가 마법처럼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갱년기의 열기는 예고 없이 찾아와 몸을 달구고, 텅 빈 통장이 주는 현실적인 불안은 여전히 서늘한 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듭니다.
하지만 이전과 명확히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내 삶에 닥친 비극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일에 아까운 생명력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나의 영토를 침범하려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짜 신들에게 정중히 작별을 고했고, 자식이라는 우상을 깨뜨린 자리에 '나'라는 한 인간의 고독을 당당히 세웠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내면에 카오스(Chaos)을 간직해야 한다"라고요.
돌이켜보면, 이 책을 채운 13편의 에세이 속 화자들이 짊어졌던 아픔은 곧 각자의 혼돈이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갔던 청년의 절망, 명함을 잃고 방황하던 중년의 공허, 낡은 육체로 사랑을 갈구하던 노년의 비애까지. 각기 다른 삶의 무게에 휘청거리면서도,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끔찍한 괴로움을 도망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했습니다.
삶의 쓰라린 진창을 기꺼이 끌어안고 기어이 자기 삶을 긍정해 내는 그들의 치열한 삶을 한 편 한 편의 철학 에세이로 써 내려가며 나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활자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그 화자들이 사실은 모두 상처투성이였던 '나 자신'의 또 다른 얼굴들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견뎌내고 우상을 깰 때 나 역시 묵은 상처를 치유받았고, 그들과 함께 나도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지독한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마침내 건져 올린 것은 거창한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비겁함을 가차 없이 내리쳤던 철학자 니체의 서늘한 문장들, 그리고 선악의 잣대 너머에서 무심하게 꼬리를 흔들던 내 고양이 탱고의 눈동자였습니다.
우리는 왜 고양이를 귀여워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털이 부드럽고 눈이 커서가 아닙니다. 고양이는 결코 남의 눈치를 보며 춤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프면 울고, 졸리면 자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발톱을 세웁니다.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본능과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그 '무례할 정도의 당당함'.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기 삶의 규칙을 정하는 주인이자, 부서진 세상 위에서도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고양이를 귀여워하면서, 사실은 우리가 오래전 잃어버린 그 압도적인 자유를 동경해 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가장 고귀한 승리는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자기 초극'임을. 그리고 그 초월적인 도약의 끝에는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유희하는 고양이의 걸음걸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책을 함께 읽어준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을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은, 정말 당신의 것입니까?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그 '안정'은, 정말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까?
남들이 정해놓은 정답에 맞춰 걷는 그 길이, 정녕 당신을 행복하게 합니까?
만약 대답이 주저된다면, 지금 당장 당신만의 망치를 드십시오. 우상이 부서진 그 폐허 위에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짜 생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우리를 속이고 부수더라도, 우리는 그 조각들 위에서 다시 나만의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나의 군주 탱고가 내 원고 위로 훌쩍 뛰어올라,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엉덩이를 들이댑니다. "이제 글 쓰는 건 그만하고 나랑 놀자"라는 저 오만하고 귀여운 명령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온몸으로 복종해야 할 가장 눈부신 나의 운명(Amor Fati)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