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풍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하얼빈 - 김 훈

by 어제만난사람




침묵과 절망이 결빙된 차가운 얼음 위를 힘겹게 걷던 안중근. 그가 쓰러지는 순간, 스크린을 가득 채운 꽁꽁 얼어붙은 강의 풍경은 사람을 압도시키는 데가 있었다.

‘이 영화는 뭔가 다르겠구나’하는 찰나, 옆에서 남편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고편이 전부라던데."

스포일러가 아니길 바랐건만, 그 말대로 첫 씬의 아름다움이 가장 멋졌다. 특히 개연성에 집중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스토리가 당최 몰입이 되질 않았다.


안중근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진 일본 순사는 자긍심이 있고, 뛰어난 군인이었던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렇게 능력 있는 자가 인질에서 풀려난 후부터는 스토커처럼 안중근을 잡으려 혈안인데, 그의 열등감에 비해 행동은 너무 과잉하여 열연은 서글플 정도로 작위적으로 보였다. 붙잡힌 독립투사인 동료가 스테이크를 손으로 쥐어뜯듯 먹는 장면에서도 배우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연출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몇몇 남정네들은 지나치게 멋지기만 해서 또 몰입이 안되고... 가장 이질감이 적게 든 인물이 이토였다니깐.

넷플릭스에 나오면 보자고 했을 때, 굳이 영화관에 끌고 가서 봐야 한다던 남편 왈, 이 영화는 애국심으로 보는 거라나. 평화의 댐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내 돈 주고 보는 애국심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반년이 지난 후에야 그 영화가 김훈의 소설이 원작인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이순신을 좋아하기에 그의 안중근이 궁금했다. 영화와는 어떻게 다를지도.

의외로 영화는 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했더라.

영화적 장치로서 일본 순사나 몇몇 추격신, 고문신을 넣었겠구나 하는 것도 납득이 갔다.


소설 《하얼빈》은 김훈 특유의 문체 — 절제되고 건조하며 관조적인 - 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묘사한다. 그런 느낌이 영화 곳곳에서 잘 표현되었음에도 왜 영화가 재미없었을까 생각해 보니, 소설은 끝까지 동일한 시선으로 안중근의 죽음까지 끌고 가는데 반해, 영화는 상업적 요소를 집어넣으려고 하다 보니 이 시선이 곳곳에서 무너져서였을 것 같다.

재미나 국제 시장 같은 얕은 감동을 추구하는 관객은 건조하면서도 서글픈 그 시선이 지루했을 것이고, 반대의 관객에게는 날조된 감동이 작위적이고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므로.





김훈의 문장은, 안중근을 신화로 만들지 않는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 안중근은 고뇌하고 흔들리며, 실패에도 묵묵하게 자기를 던지기 위해 움직인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가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분명 《하얼빈》은 반일 정서를 바탕으로 한 저항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피해자’라는 단순한 프레임에 가두지 않는다. 이 나라는 스스로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썩어 있었음을, 백성의 삶을 통해, 이토의 눈을 통해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길에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똥을 싸며, 잔인하게 핍박받던 천주교도들은 서구에 밀서를 보내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이 나라를 침략해 멸망시켜 주기를' 바란다. 순종은 제 한 몸 운신하기 급급하고, 그의 아들들은 일본에서 교육받으며 고분고분한 '신민'으로 자라난다. 백성들이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궐기해도, 충신이 나라 잃은 슬픔에 가슴을 찢으며 자결하여도, 아름다운 몇 줄의 문장으로 자기의 책임을 가볍게 외면하는 왕과 그걸 악용한 친일관리들은, 썩을 대로 썩어버린 나라를 잘 보여준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세워진 나라라도 그 마음을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관리하지 않은 집이 무너지듯, 망국으로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인내천을 말하며 수많은 민중을 끌어모았던 동학군도, 그 의지의 표상이던 수장들을 잃자, 산적이나 강도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약탈범으로 변했다.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그걸 안중근이 막아섰다는 짧은 문장은, 민중 봉기가 어쩌다 폭도로 전락했는지를 암시한다.


을사조약, 청일전쟁, 쇄국정책, 가톨릭 박해, 토호의 횡포 — 그 수많은 역사적 조건이 이 나라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일본이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이빨로 우리를 물어뜯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잠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담담하고 건조한 묘사 안에서 독자는 눈을 뜨게 되고, 비분강개하게 된다.


김훈은 이토 히로부미를 글짓기에도 능하고, 정보 파악과 정치 공작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략가로 묘사하였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이토의 능력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충분히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스템의 구현자', '제국의 건축가'로 묘사되기에, 감정적으로 공감을 할 구석은 없고,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능력은 인정하되, 감정적으로 공감이 되지 않도록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의 묘사라 좋았다.



김훈의 《하얼빈》을 읽고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우리가 너무나 단순한 역사 교육을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100% 가해자였고, 우리는 100% 피해자였다는 프레임.

일본 제국주의는 악랄한 침략을 일삼았으며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자국의 잔혹함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당시의 조선은 백성을 위한 나라였는가? 국민을 위하는 나라의 우두머리가 국민을 볼모 삼아 일신의 안녕만 도모하는 나라가 번영할 수 있는가? (얼마 전 국회와 국민에게 총을 들이밀라며 군대를 움직였던 어떤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가 움직이는 목적지에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이 있지 않는 이상, 군대가 진지를 이탈하는 것은 내란임에도 이것을 이런저런 말로 꾸며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일본의 진심 어린 국가 차원의 사죄와,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제대로 된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아픈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



세습벌족으로 태어나 뒷짐 지고 거들먹거리는 유생들이나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무지렁이들이나 죄의 규모는 차이가 있었지만 죄의 내용과 죄의 계통은 대체로 비슷해서 인간의 죄는 몇 개의 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하되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내밀한 죄들을 다들 깊이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 죄는 마음에 사무치고 몸에 인 박혀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성찰하거나 고백할 수 없을 것임을 빌렘은 알고 있었다. - 63


...... 도마야 악을 악으로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 이 말이 너무 어려우냐? 네가 스스로 알게 될 때는 이미 너무 늦을 터이므로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빌렘은 그 말을 안중근에게 하지 않았다. -66


- 기념 연설문은 평화를 중심으로 해서 작성하라. 일본 제국이 설정하는 평화의 틀 안에서 동양 삼국과 러시아가 조화롭게 온존 할 수 있고, 문명개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일본은 이 틀을 강고히 할 중대한 책임이 있음을 밝히라. 문명은 선진에서 후진으로 흐르는 것이며 평화와 문명개화가 같은 방향임을 말하되, 언사를 숙여서 순하게 하라.

지시를 마치고 이토는 궁내성 비서관에게 술 한 잔을 주었다. -109


교회가 영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이토가 만든 세상의 땅 위에 세워진 것이고, 빌렘도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그 땅 위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고 빌렘 자신의 모순에 부딪혀 있을 것이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가 죽이는 무수한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시니, 빌렘이 교회를 짊어지고 이토의 땅 위를 걸어간다 하더라도 안중근에게는 하느님의 자식 된 자로서 빌렘과 더불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222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화 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