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기술의 발전에 비해 종의 발전은 너무나 너무나 느려서, 과연 인간이 그 발전을 누릴 만큼 적합한 존재이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는 문화가 은연중에 여기저기에 깔려 있다.
‘기계 인간이 인간보다 나을 거야, 그들이 다음 세대의 지배종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폭력성은 결국 핵전쟁과 같은 자멸의 길로 이끌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건 당면한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이용하는 인간의 우매함'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기술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똑똑하고 사악한 머신들이 인간을 살육하고 멸망시키는 미래관이 많았지만, 이제 인간도 안다. 기계들이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기계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기계들이 판단하기에도 인간이 지구에는 독과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는 걸.
그렇다면 인류가 좀 더 빠르게 인격적으로 성숙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작가는 이 부분을 고민하면서 선이의 가치관에 무게를 두고는, 기계이거나 복제된 존재일지라도 자아가 있다면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인간을 위해 생산된 클론일지라도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깨달음을 일찍부터 할 수 있고, 기계로 만들어졌을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한눈에 세계의 흐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어서 전쟁이나 영토 싸움, 예쁜 옷과 멋진 시계, 학벌과 계층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금방 이해한다고.
그러나 소설은 거기서 끝이었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21세기 인간이지만, 소설 속의 미래에 우릴 위한 자리는 없었다. 미래는 우리와는 다른 종이라 부를만한 존재들의 것으로 남는다.
자신을 냉소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참으로 고귀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오히려 그 자리에 인간은 지워진다.
지구가 46억 년을 소중하게 키워서 꽃 피운 생명들의 가장 어린 종 중 하나인 인간에 대해, 스스로가 이토록 잔혹한 평가를 내린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류가 고작 몇 만년의 진화로 태어났고, 그러면서 이렇게 지구를 황폐화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46억 년의 지구가 이제야 드디어 자신을 이해해 줄 아이를 만들었다고 말할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구는 황폐화되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여타 생물이 살기에 불편해지는 곳이 늘어나는 정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구 전체가 사막이거나 바다가 되어도 지구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사막에서도 바다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이어질 수 있으니까. 지구가 보기에 인간은 그저 자기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낳은 자식이고, 자유롭게 뛰어노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지구는 46억 년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왔고, 자기 자신이 원인이 되지 않은 한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영화 속 시대 중에는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간 것에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인 배경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인간들은 다시 야만으로 돌아간 것처럼 처절하게 삶을 갈구하지. 처참한 굶주림과 추위, 긴긴 이동, 야생의 무서움을 겪으면서도 연대하거나 신뢰를 쌓으며 살아남은 선조들의 DNA를 가진 인간들이, 위협에 처하면 자기의 생존을 위해 연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선택을 할 거라는 말이다. 물론 인류가 언제나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자면 문명은 대체로 더 이해가 깊어지고, 포용적이고, 자유를 갈망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위협을 느끼면 연대부터 하던 자들의 후손인 것이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비판적인 시각도 좋지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될까 걱정될 정도로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자주 암울함으로 넘실거린다. 다가올 미래는 부디 이런 상상력으로 그려진 세계보다는 낫길 바라고, 그러려면 미래 세대는 적어도 우리보다는 좀 더 이타적이고 지혜로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인 인류가 되려면 말이다.
기술만큼이나 정신의 발전이 더 급한 문제가 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83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간에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적 무와 진공의 상태에서 보내지만 아주 잠시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우주정신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이며, 의식이 살아 있는 지금, 각성하여 살아내야 한다.
그 각성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개개의 의식이 찰나의 삶 동안 그렇게 정진할 때, 그것의 총합인 우주정신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100
선이는 기계가 의식을 가진 이상,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과 깊은 수준에서 '연결' 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의식은 선이가 말하는 '우주정신'의 일부이므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없고 다만 그렇게 만든 어떤 조건과 상황이 문제라는 식이었다. 108
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보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수용소에도 그리운 감정이 든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112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