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마 -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엔 그저 SF 소설의 흔한 클론 이야기인 줄 알았다.
간병인이었던 캐시가 은퇴를 맞이하며 회상하는 이야기들, 토미와의 사랑, 루스의 질투, 해일셤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어느 순간 섬뜩하게도, 이 모든 것이 이미 끝이 정해진 삶의 소모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이 겪는 감정은 너무나 인간적인데, 그들을 둘러싼 설정은 인간답지 않아서 묘하게 불쾌하다.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엔 회피와 자기기만이 끈적이게 얽혀 있다.
가장 무서운 건, 이들을 착취하는 실질적인 '악당'이 없다는 점이다. 누구 하나 폭력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다. 심지어 교장이나 마담처럼 '좋은 의도를 가졌던 어른들'조차도 이 체제를 정당화하는 얼굴 없는 설계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이 세계가 어째서 21세기나 22세기의 미래가 아니라 20세기를 배경으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클론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이 발달하려면 적어도 1950년대일 수는 없다고.
작가가 아주 오래 전에 책을 쓴 걸까? 하지만 이 책은 2005년, 21세기에 쓰인 소설이었다. 그러면 시대를 굳이 과거의 어느 가상 시점으로 설정했다는 것이 괴이할 수 밖에 없다. 왜 이시구로는 미래를 끌어와서 굳이 과거에 가져다 붙인걸까?
이 질문을 떠올리자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이것은 클론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였다.
조금씩 무언가를 내어주며 살아가고, 시간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 중 누군가는 노동력을, 누군가는 신념을, 누군가는 침묵을 조금씩 기증하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그 대가로 돌아오는 건 겨우 유예, 혹은 착각에 가까운 존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며 살아가다 죽어가는 존재이며, 그것을 막연히 알면서도 모두가 모르는 체 하고 살아간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점에 퇴색한 사랑을 붙들고, 죽음이 임박해서야 그간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후회하며 뉘우치곤 하면서......
그렇다고 이 소설이 절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토미가 진흙 속에서 울부짖고, 캐시가 마지막까지 사랑을 붙들고, 마담을 만나 끝내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마담과 교장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 그 무력한 질문조차 이 세계의 윤리적 결핍을 드러내는 힘이 있다. 비록 소설은 비극으로 끝이 나지만 캐시의 질문은 그 자체가 저항이었고, 독자는 그런 가냘픈 저항에서 철학적, 윤리적 판단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종종 일본 만화나 소설에서 자기 위안적인 서사를 발견할 때 불편함을 느껴 왔다. 전쟁 책임을 흐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악당조차 슬픔 속에 미화되어 가는 미야자키식의 정서는 모든 이가 상처받은 존재로 수렴되도록 만든다. 전쟁 피해자의 감성을 운운하기에 앞서 그들은 명백한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그 감성을 말하고 싶다면 이전에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앞서야 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피해자나 가해자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하게 만든다. 모두가 피해자인 세계에선 책임이 실종되고 역사의 윤리성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는 세계만큼 위험하고 비참한 세계는 없다. 이 소설은 그러한 가상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만든다. 누구에게 탓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우리 모두의 책임을 더욱 부각시킨다.
『나를 보내지 마』는 클론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지만 이시구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래의 생명공학도, 디스토피아의 기술적 위협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감정과 윤리의 장치를 통해, 우리 모두가 이미 살고 있는 ‘체제’의 얼룩을 보여주려 했다. 바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지만 모두가 순응하며 살아가는 세계.
캐시가 교장을 찾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