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윌리엄 제임스
이 책은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흐름에 대한 제임스의 정면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는 결정론을 "이성의 자살"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인간이 윤리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세계가 완전히 예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는 브록턴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예로 들며, "모든 사건은 필연이다"라고 주장하는 결정론자들의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1800년대 말 제임스가 살고 있던 시기는 라플라스,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의 신화가 철학에도 깊이 영향을 미쳐서, 신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은 우주에 대한 관념이 종교나 철학사에도 우세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현대의 독자들은 결정론이라는 전제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이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며, 나비 효과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믿는 다수의 시대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당연히 여기며 살고 있다.
그건 무한한 책임과 자율이라는 고통을 함께 감당하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100년 전의 이 책이 주는 울림이 다소 제한적으로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하나, 그의 사상적 바탕에 깔린 다원주의는 우리 시대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좀 더 포용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제임스는 한 인간의 내적 경험, 즉 주관적 감각과 판단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철학이 이 주관성을 회피함으로써 삶을 도식화한다고 지적했다. 삶의 진리를 찾으려거나 하나의 거대 담론을 형성하고 싶어 하는 철학의 일반적인 특성과는 달리, 그의 철학은 절대적 진리보다 다양한 삶의 형식들을 존중하는 다원주의로 발전해 간다.
나는 종종 "삶은 왜 이토록 흔들리는가, 의미라는 것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하고 질문을 하곤 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진실과 의미를 발견한다고 했다. 타인의 칭찬, 비난, 이해와 오해는 모두 부차적일 뿐이며, "자신만이 자기 삶의 의미를 결정지을 수 있다"라고.
이와 같은 주장은 일견 불교적 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삶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단지 나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견뎌내고, 마침내 노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해석으로 고통을 수용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삶은 조금 더 온기가 생긴다.
사실 제임스는 자기 철학대로 살아온 몇 안 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실천적인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발견하고자 했다.
니체나 하이데거처럼 철학의 주창자인 본인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철학은 매력적이고 강력한 이론이 되어 제국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자들에게 이용되거나, 선동의 수단으로 곧잘 쓰였을 정도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실천적이고 실현 가능한 철학보다 이상적이고, 닿을 수 없는 관념적 철학이 인간에게 더 매력적으로 비치는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제임스의 다원주의 은 철학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날까지도 주류의 일부나 그 외곽에서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다.
그의 낙관적 다원주의, 경험론적 입장은 납득가능한 유연한 철학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바꿀 동력이 부족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핍으로부터 시작에 어떤 의미나 목적을 향해 자기 자신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일으키는데, 제임스는 그런 의미에 대해 '그런 것은 없을 수도 있지만, 네가 하는 것들이 결국 의미를 쌓아나가는 거야. 작은 의미들에서 우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거지. 물론 큰 의미라는 건 결국 없는지도 몰라. 우주는 아무런 목적이 없을 수도 있고, 너의 삶은 그저 살다가 죽는 것일지도 모르지. 다만 우리는 주어진 것 안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을 뿐이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라,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사람처럼.
말은 좋지만 내일 멸망을 안다면 대부분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영웅이나 초인을 가정하거나, 절대정신을 말하는 단단한 철학에 의탁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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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만 너무 많이 하고 실제로 책임지는 행동은 하지 않으면, 지나친 감각주의에 빠졌을 때처럼 자주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27
대체로 고통이나 고난은 삶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삶에 대한 열정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사실 아주 놀라운 일이다. 우울의 주요 원인은 오히려 충만에 있다. 욕구와 투쟁은 자극과 힘을 주지만, 승리의 시간은 우리에게 공허감을 가져다준다.-39
15~17세기 발도파 신자들에 대한 일화 - 장미의 이름에도 나왔던 발도파에 대해 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역시 종교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발견함.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사색적이라면, 사색의 힘으로 쉽게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이때 도의심은 아주 강력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아무 죄 없는 짐승들이 도살장에서 숱하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 덕분에 배불리 먹고 입고 성장해서 여기에 편안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우리 삶의 밑거름이 된 그 모든 생명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살아가면서 참을성 있게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43-44
불가지론적 실증주의자들이 보기에 우리는 언제나 믿음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기다려야 하고, 증거를 찾지 못하면 가설도 체계화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입장은 추상적인 견지에서 안전한 태도다. 사상가는 철학적으로 중립을 지키거나 어느 한쪽만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중립을 지키는 것은 내적으로 힘들고, 외적으로도 실현하기가 어렵다. 선택 가능한 것과 실질적이고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믿음과 의심은 태도로 나타나고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
자연세계를 더욱 영적이고 영원한 어떤 것의 징표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믿고 싶은 내적 욕구가 아주 강력하고 분명하다. 마치 과학자들에게 일관된 인과법칙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9-50
나는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선택한 신앙의 타당성을 오랫동안 옹호해 왔다. 그런데 학생들은 논리적인 정신에 물드는 순간, 철학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이런저런 신앙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말이다. -64
객관적 증거는 그저 사유하는 삶의 아주 먼 이상을 특징짓는 열망 혹은 한계개념일 뿐이다. 어떤 진리들에 객관적 증거가 있다는 주장은 그 진리들이 참이라고 생각하고 정말로 참이므로 그 증거가 객관적이라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증거가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어떤 증거가 정말로 객관적이라는 확신은 또 하나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
하지만 경험주의자로서 객관적 확실성을 포기한다 해도 이것이 진리 자체에 대한 희망이나 추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힘은 결과와 결말에 있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생겨나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이끄는가이다. 83-85
무언가 사실이 되리라는 예비적 믿음이 없으면, 그 사실이 아예 실현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사실에 대한 믿음이 그 사실의 창조를 돕는 것이다. - 95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들은 대부분 이러하다. 생각의 힘이 커져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종교의 경우 그 유익함만큼이나 해악도 거대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약간의 제지를 받는 것이 굳이 나쁘게 보이지도 않는다.
진리가 우리 손안에 들어올 때를 확실히 알려주는 종소리 같은 것은 우리 안에 없다. 종이 울릴 때까지(구원의 때를 말하는 듯) 의무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엄숙한 설교는 경험주의자에게는 어리석은 망상처럼 들린다. -102
삶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되고, 틀렸다면 그 결과도 감당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고, 최선의 결과를 바라되, 주어지는 결과를 받아들여라.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 해도, 이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최선의 태도이다. - 피츠제임스 스티븐 , 103-104
결정론은 우리에게 유감스럽다는 판단을 잘못된 것이라 부르게 만든다. 불가능한 것도 당위임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유감의 판단이 염세적이기 때문이다. (...) 유감이 나쁜 것이 되어야만 살인과 배반은 좋은 것이 된다. (라플라스의 결정론, 기계주의적 과학 철학 사조에 대한 비판) -132
주관주의적 관점에서는 중죄인의 감방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하찮은 인간이, 운명의 총아가 한 번도 입술에 대보지 못하는 진리의 술을 몇 모금 마실 수도 있다. 그 한 모금 한 모금의 자각은 세월과 더불어 인간의 살아있는 가슴에서 생성되는 위대한 윤리의 교향악에서 꼭 필요한 음표가 된다. 주관주의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 세계는, 우주의 영혼이 자신의 진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면서 영원히 숙고하고 표현해 내는 끝없는 이야기 -140
당신의 감성을 거두어라! 지나치게 불평하는 것도, 넘치는 열광도 멈춰라! 감정에 휩쓸리는 바보짓을 그만두고 사람답게 일(work)하기 시작하라! - 토마스 칼라일, 145
윌리엄 맬록이 말한 것처럼,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우리의 도덕적 삶은 약동하는 현실성을 얻으며, 너무도 낯설고 정묘한 자극으로 설렌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부인하고,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고 예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과 나는 계속해서 자유를 믿는 오류를 범하도록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