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공기는 노을색이 짙어질수록 무겁고 텁텁해지는 것만 같았다. 늦여름 저녁 어느 날, 티브이에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여자 가수가 관객들의 환호 속에 노래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막 퇴근을 해서 저녁을 차리고, 나는 수저를 식탁에 놓으면서 티브이를 흘끔거리는 걸로 저녁 차리는 걸 돕는 시늉을 하는 중이었다.
그 가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낯익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매, 부러질 것 같은 길쭉한 팔과 다리. 바로 얼마 전에도 이런 여자가 가수로 데뷔해서 사람들을 열광시켰었지. 모든 남자들이, 심지어 소녀들까지도 동경할 만큼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녀는, 스캔들이 크게 한 번 난 뒤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어린 내 눈에 조차 첫 번째 가수의 공백기에,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티브이 속 그녀가 대항마로 투입되었을 거라고 여겨질 만큼 둘은 닮아 있었다.
원본 가수가 데뷔한 때만큼의 돌풍은 아닐지라도 상당수의 팬은 카피본인 여가수에게로 이동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관객들을 보며 저 여가수는 분명 지금 성공을 실감하고 있겠지.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일들은 이전에도 수 천, 수 만 번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노래하는 가수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그녀든, 그든, AI든, 그 밖의 어떤 다른 것이든, 사람들이 열광하는 가수, 아이돌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다.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역시 다수로 존재한다. 이미 입력되어 있는 자리에 개체만 바뀔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는 비단 티브이 속 가수와 같은 아이돌의 자리 하나만이 아니었다. 지배자의 자리, 피지배자의 자리, 많이 가진 자의 자리, 궁핍한 자의 자리, 숭배받는 자의 자리, 멸시받는 자의 자리......
사람들은 선망의 자리에 도달한 이들에 대해 그들의 노력과 운을 이야기하며 칭송하거나 부러워하고, 경멸의 자리에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게으름이나 부족한 성품을 문제 삼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나, 자리는 보지 않고 인물의 개체성으로 그들이 다다른 위치를 설명해 왔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자리들은 그저 거기 있으면서 시간을 비웃고 배역을 갈아치워 온 것은 아닐까? 히틀러, 칸, 소크라테스, 심지어 예수나 부처 같은 존재를 위한 자리마저도.
분명히 어떤 이가 특정한 자리에 있는 배경에는 개별 자아의 노력이나 운이 작용한다. 그러나 벨이 전화기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동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전화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처럼, 시간은 그 시대가 마련해 놓은 자리 주변에 있는 적절한 인물 중 하나를 대충 골라서 세워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화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반드시 등장해야만 하는 정상과 바닥, 그 골과 골을 유영하다 사라지는 물거품, 하나하나의 물거품들이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이미 흘러가게 되어 있는 거대한 파도의 흐름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역사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도, 그 사건 속의 영웅이나 악랄한 지배자도, 하나의 이벤트처럼 등장하고 사라진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보편적인 욕망이 대체로 유사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문명이 지구에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지도.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사실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충격적인 진실로 느껴졌고, 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 또 다른 눈이 처음으로 뜨인 날이었다.
그다지 잘 부르지도 못하는 여가수의 노래를 들은 그 저녁 이후, 나는 내 삶에서 약간 비껴 나온 사람이 되었다.
내게 주어진 것이 이 삶뿐이기에 살아갈 도리 외엔 없으나, 반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눈으로는 주어진 것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선 자리를 바라보았고, 내 주변의 다른 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관찰했다. 가능성과 한계, 시작과 끝이 있는 짧은 생명의 자리. 찰나와 같은 그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기억되고 있는’ 역사와 ‘잊힌 역사’의 총합이 인류의, 생명의, 우주의 역사겠지. 그리고 ‘잊힐’ 역사의 한 조각을 나는 품고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기억될’ 역사 속에 남고 싶은 욕망이 쑥 하고 올라왔다. ‘성장하고, 남들보다 앞서고, 누군가를 이끌거나 귀감이 되며 본받을 만한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런데 이 마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욕구이지 않은가. 나뿐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모두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이 의미를 찾는 동시에 ‘왜 나는 잊히고 싶지 않을까’라는 질문도 떠올랐다. 잊힌다는 것이 왜 두려울까? 내가 죽고 난 뒤의 세계에선 이미 나의 몸도, 나의 자아도 그곳에 없는데. 왜 인간은 더 나아지고 싶고, 비교 우위가 되고 싶은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을까?’
질문은 점점 늘어가고, 답은 너무나 많아서 어떤 것도 답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떤 날에 답은 ‘그저 사는 것’이었다가, 어떤 날에는 ‘의미 없는 삶은 죽은 것’이 되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은 아니다’ 싶다가도,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것’이 부질없기도 했다.
삶의 자리를 살짝 비껴 나 참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채 조금씩 나이가 들어갔다. 지켜보기만 하는 눈에 비친 삶은 깨어진 거울처럼 반짝이고, 지는 노을처럼 찬란하면서, 달 없는 밤만큼 어둡고 무서웠다. 모두가 처음 살아가는 생일 텐데, 유난히 나 혼자만 서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당연한 듯 알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이나,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생각들도, 내게는 당연하지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자리들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삶은 나와 반쯤 떨어진 곳에서 저 혼자 흘러갔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자신의 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눈앞의 것들로 자기 자신을 꽉 채워서 사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그러다 아이가 둘이 되자, 일상을 살아가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바빠졌고, 아이들을 중심으로 엄마들의 세계가 맞닿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살아가는 일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바삐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있음을, 나의 삶을 오히려 잊게 되었다. 돌아볼 여력도 없었지만, 세속적인 계산과 관계들이 너무나 빼곡하게 들어차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관계와 상황이 내 삶을 휘두르고 있는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참여자가 되는 순간, 관찰자로서의 눈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대성당을 읽으면서 나는 삶의 참여자이자 고통스러운 관찰자로서 관조적인 시선을 가진 작가를 만났다. 그의 담담하고 건조한 필체에서는 삶의 고난과 비애만큼이나, 생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삶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카버의 글에서는 작가의 삶이 무척 가깝게, 그리고 치열하게 읽혔다. 빛나는 순간 따위 없어도, 귀감이 될 만한 삶이 아니어도,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강인하고 꽉 차 있는 인생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항상 글쓰기를 어렵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쩌면 다만 온전한 나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것이 글쓰기는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의 이 마음을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에 대한 헌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덮으면서 내 글에 대해서 조금 더 솔직해지고, 낮게 귀 기울여 내 삶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병원 앞에 대형 자동차 한 대가 서자 롱코트를 입은 한 여인이 그 차에 올라타는 걸 봤다. 자신이 그 여자였더라면, 그래서 그게 누구든, 누군가 자기를 태우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그러니까 스코티가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이 차에서 내리면
"엄마!" 하고 외치면서 품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곳으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안 돼,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놔두고 갈 순 없어. 안 돼." 그녀는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듣고는, 흘러나오는 말이라는 게 고작 TV프로그램 같은 데 보면, 폭력이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넋이 빠진 사람들이 쓰는 그런 따위라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말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