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앞의 몇 단락을 넘어 가기가 참 힘든 책이었다. 조르바의 거친 말투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천박함만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마초적이라고 부르기 애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도 묘한 시선이 소설 여기저기에서 엿 보였다.
조르바라는 캐릭터는 매력적이었지만,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님에도 이 소설 속 여인들의 삶이 지극히 남성적인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동네 청년들의 구애도 뿌리치고 혼자 살던 과부가 서술자인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여성의 내면이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아 마치 과부가 부유한 사업가를 유혹한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선으로 보는 이야기를 한 번 써 보았다.
사랑에 목메는 것이 여자이기는 하지만 '사랑에만' 목을 메는 여자는 없다는 것을 남자는 결코 모르기에.
글을 본 언니가 왠지 이 영화가 떠오른다며 말레나를 추천해 주었다.
전쟁기 소년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욕망과 사회적 편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남성이 성적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영화라고 한다.
말레나 - 쥬세페 토르나토레
모니카 벨루치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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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들릴 듯 말듯 한 작은 소리가 문간을 스쳤다. 오늘은 달이 없는 밤이지만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거울 속의 여자는 영락없이 늙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빛을 약하게 하면 그럭저럭 봐줄 만했는데......’ 한숨을 내쉬며 오르탕스 부인은 한 번 더 거울을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슬리퍼를 소리 없이 끌며 문 쪽을 향했다. 그녀가 시끌벅적하게 맞이해야 했던 남정네들과 달리 이번 손님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늦은 밤 실례가 되지 않을까 했었어요......"
과부는 검은 머릿수건을 풀며 인사를 건네었다. 물결치듯 풍성한 머리칼이 과부의 어깨 위로 넘실거리며 흘러넘쳤고, 밤의 향기가 그녀와 함께 방을 가득 채웠다.
과부가 지나는 자리마다 흩뿌려지는 그 마법이야말로 양날의 검이 되는 무기라는 것을 부인은 체득한 지 오래다. 그러한 무기를 가졌던 젊은 시절, 오르탕스 부인은 뭇남성들의 연인이 되기 위해 여자의 적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연인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는 불어난 살들과 늘어진 팔뚝 덕분에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부는 달랐다. 그녀가 마을의 어떤 남자도 선택하지 않았기에 그녀 생명의 초는 시시각각 짧아지고 있었고, 멍청한 마을 총각 하나가 짝사랑의 열병을 못이겨 스스로 생을 마감한 덕분에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부인은 애틋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띠며 과부를 집 안으로 들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당신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뭐가 그리 다르겠어요! 어서 들어와요, 이쪽으로."
과부는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치맛주름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내밀고 부인 또한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앵무새가 새장에서 푸드덕하고 날갯짓하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든 과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인은,”
하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누가 보아도 퇴물이 된 늙은 여자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청혼을 받으셨다지요."
그제야 부인은 과부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늦은 밤 갑작스레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미미코를 통해 받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여태 왕래가 없던 두 사람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지는 소문이 아니고서는 서로의 소식을 알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제 오르탕스 부인은 안다. 그녀와 과부는 결혼이라는 같은 탈출로를 찾고 있었다는 걸. 불행하게도 과부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음을.
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조르바에게 받은 반지를 내밀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자랑을 시작했을 테지만, 그녀도 지금 자기 앞에 앉은 여자가 어떤 심정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군말 없이 과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오, 가여운 분!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사장님은 당신을 이미 사랑하고 있는 눈치였어요. 아니, 사랑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당신을 안고 싶은 마음만큼은 확실해요! 이 내가, 오르탕스가 보증합니다. 그건 결코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그를 잡아요, 그가 오면 문을 열어요!"
" 저는 이미 그 분께 언질을 드리기도 했었어요......"
과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유혹하지 않아도 남자들은 꿀을 발견한 개미 떼처럼 끝도 없이 들러붙었다. 자신을 가장 든든하게 지켜주겠다고 생각했던 남자를 남편으로 맞았으나, 그 건장함 덕분에 전쟁터에 가장 먼저 끌려갔고 가장 앞장서서 죽고 말았다. 남자들은 처녀 시절의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서로 다퉜지만, 과부가 된 그녀에겐 침을 뱉으며 흘끔거렸고, 낮엔 아내와 동네 처녀들의 눈치를 보다가 밤이 되면 도둑고양이처럼 대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이젠 예배를 드리러 나갈 수조차 없어요. 파블로가 바다에 몸을 던진 뒤부터는 내 치맛자락만 보여도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어 대니까요. 저는 그를 거절했어요. 남편이 떠난 뒤로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만 살아왔는데, 파블로가 죽은 날에야 알았지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승과 더욱 빨리 이별할 뿐이라는 것을요.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나는 그곳에 빨리 가고 싶지 않아요. 내 화단의 오렌지와 레몬향기를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맡고 싶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을 거야....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예요.”
과부는 결국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고,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그 분 외에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오지 않았답니다. 이대로면 전 평생 동안 집 안에 갇혀 살아야만 해요."
오르탕스 부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여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악마들을 언제나 곁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측은한 눈길로 울고 있는 과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정말이지, 이 빌어먹을 마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섬 밖에서 온 남자들의 힘에 의탁해서 이곳을 벗어나는 길뿐이죠.. 하지만 내가 한 말을 믿어봐요. 아니, 아니지 그래! 내가 조르바에게 말을 해 놓을게요. 그이가 비록 우리 카나바로만큼 멋진 인물은 못되지만, 그래도 마음 하나만큼은 대단하니까. 그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거짓이 없거든요. 그 때문에 사장님은 조르바의 말에 결국 수긍하고 말아요. 그러니 기다려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당신이나 나나, 비록 살아온 길이 다르기는 해도, 지켜줄 방패 없는 신세라는 점은 같으니 이 배를 잡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떠날 수 없을 거예요. 이 섬에 남아 있는 미래라곤 우리의 죽음뿐, 그러니 잡아야 해요! 당신은 당신의 배를, 나는 나의 배를......!"
수건을 고쳐 쓰고 조용히 어둠 속의 오솔길을 따라 사라지는 과부의 모습을 보며, 오르탕스 부인은 부활절 전 자정 예배를 드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배가 떠나면, 그녀에게 다음은 없다.
자신은 배를 타게 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함은 가시지 않는다.
기도를 드려야지, 마지막 배를 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