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의 시대를 지나며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by 어제만난사람


나는 경상도, 그것도 흔히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내 주위 어른들의 대화 속에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늘 따라붙었다. “전라도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장터에서, 심지어 가족 모임에서도 당연한 듯 오갔다.

'전라도 그 동네는 빨갱이들이 원체 많고, 그래서 그런가 전라도치는 앞에서는 싹싹하게 굴다가 뒤에서는 반드시 배신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입에 오르내렸다. 신기한 것은, 그 말을 내뱉던 사람들 중에는 같은 마을의 경상도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뒤통수를 맞은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는 점이다. 사기를 친 경상도 사람의 이야기는 잊히지만, 사기를 친 전라도 사람의 이야기는 잊힐 새도 없이 퍼 날라졌다.


전라도라는 단어가 나오면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저쪽은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념과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씌워진 낙인은, 이처럼 구체적 경험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만큼 ‘빨갱이’라는 말은 무서운 낙인이었고, 공포와 증오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시대의 언어였다.



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었다. 초등생인 우리 중엔 김대중을 뽑으면 나라가 적화통일이 된다는 말을 자랑스레 떠들던 애들도 있었다. 선거권도 없는 10살짜리 애들에게 누가 저런 말을 가르쳤던 걸까.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이라는 단어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결과는 늘 동서로 나뉜 채 지도 위에 찍혔고, 대구와 경북은 언제나 변함없는 결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서 선거 지형은 조금씩 변했다. 파란색과 초록 혹은 노란색, 빨간색이 곳곳에 섞여 들어가며 ‘알록달록한 지도’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 변치 않을 것 같던 지역들 중에도 색깔이 뒤바뀌는 곳이 가끔씩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구는 여전히 견고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는 바 없이 자랐던 나는 90년대 중후반에야 성인이 되었고, 이미 민주화가 된 대한민국을 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이념도 사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빨갱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대학에는 아직도 운동권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정의에 대해서 너무 민감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대학생이 되면 학생 운동을 반드시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제발 그런데 가지 말아라, 최루탄이 얼마나 독한지 너 모르지. 백골단은 곤봉으로 사람을 개 패듯이 패는데 머리가 터져도 아랑곳 않는대이.

이런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입학을 했다. 두근두근.


운동권 선배들은 신입생을 포섭해 밥이나 술을 사주고 일장 연설을 곧잘 늘어놓았다. 그러나 문민정부도 끝물인 마당에 데모를 할 만한 명분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다음 정부는 김대중 정부였다.

내 눈에 그 선배들은 매일 술 마시고, 공부는 뒷전에, 데모할 궁리만 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전혀 멋지지 않았다. 여자 선배들도 남녀평등을 외치며 한다는 게 남자랑 똑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 혹은 자기의 성을 기존의 남자처럼 함부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들이 하는 덜 떨어진 짓을 똑같이 하는 게 평등해진 거라면 페미니스트가 될 마음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적으로 날만 세워서는 분기탱천한 싸움꾼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가 없을 성싶었다.


우리뿐 아니라 후배들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대한민국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거나 지역감정을 말하는 게 구닥다리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IMF가 터지면서 대학은 데모를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통과 의례인 관문, 취직 전 자격증과 스펙을 쌓을 시간, 밥벌이 하는 성인이 되는 시간을 유예하는 곳으로 변해갔다.


결혼 후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나는 부마항쟁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이웃들을 만났다.

그때 부산도 난리였지. 최루탄에 호루라기에, 장사도 할 수 없으니 가게마다 문을 닫고 있었지만 대학생들이 몰려와 도망치듯 숨길 곳을 찾으면 얼른 문을 열어 걔들을 안으로 들여넣었어. 그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가게 사람들이, 이웃 사장들도 얼른 셔터를 열고 애들을 숨겨주고, 도망가는 애들한테 김밥을 건네주고 힘내라고 응원했으니까.”

이렇게 말하시던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과 따뜻함이 느껴졌졌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긴 어렸지만 부모님이 처음 보는 오빠들을 데려와 한참을 보호해 주었다고 했다. 교과서에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역사였고, 대구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부산의 항쟁이 있던 날, 시민들은 학생들을 ‘빨갱이’나 ‘518 지지자’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동네에서 살아온 이웃의 자식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었다. 경찰의 몽둥이로부터 그들을 지켜내는 일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전라도=빨갱이’라는 단순한 등식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또 다른 생각의 전환을 경험했다.

빨갱이라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단어는 '부러질지언정 타협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지배당해 살고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사상을 위해 목숨을 더 가벼이 여기는 이들이라고.

한 단어로 어떤 사람을 설명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란 걸, 왜 빨갱이라는 단어 앞에선 그리 쉽게 잊었던걸까. 그만큼 그 말이 가진 압도적인 공포가 아직도 내게,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것일게다.


사람은 어떤 시기에 옳다고 믿은 걸 지나서는 다르게 생각하며 성장하는 생물이다. 홀로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썩는다. 죽은 이는 이념을 안고 죽을 수 있지만, 살아남은 이는 변할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람의 마음의 근간이 곧게 서 있다면, 변했다고 해서 그것이 배신이나 변절이 될 리가 없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범죄자의 징표인 시대이건 영웅의 징표인 시대이건 이 책의 '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 근간에 있는 사람이었다. 혁명으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믿었던 젊은 날에도, 벽장에 숨은 순경을 살려주던.


민주화 항쟁의 그날에 셔터문을 올려 시위하던 학생들을 숨겨준 사장님의 이야기나 이 책의 아버지의 삶은, 사회주의자건, 보수건, 평범한 장삼이사건, 모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증오와 배타가 깊게 뿌리내린 곳에서는 이웃조차 낯설어지지만, 위기 속에 드러나는 작은 연대와 한국의 '정'은 이념 대립을 치유해 줄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정치나 사상 이야기에 분노로 끓어오르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념이 달라도, 다름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 답은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아리의 아버지가 가진 '오죽하면'에 있다. '사람이 오죽허면 오밤중에 애 업고 야반도주를 하고 그랬겠냐'는 이해의 마음, '오죽흐면 나한티까지 와서 도움을 요청하간디'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에.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 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뿐이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21




사상이란 저렇게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가. 내 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23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44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 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67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102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147




아버지가 곡성군당위원장이던 시절, 입면으로 보급투쟁을 나갔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민중의 실체를 보았다고,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곳간을 열어 먹을 것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숨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175




"은혜를 갚을라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요. 사람의 도리제. 그짝은 순겡을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소.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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