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랜드] 에드윈 A.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있을 때 내 세계는 단순했다. 신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고, 인간은 교회를 가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기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며, 계율에 따른 삶을 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성경을 익히면 익힐수록 의문은 커져갔다.
우리가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그렇게 인간과 흡사한 낮은 수준의 욕망으로 상벌을 따진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전지전능하면서도 이브가 사과를 따먹는 것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신이라니. 성경 수업을 받다가 이렇게 물으면, 선생님은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라고 했다. 그런 소중한 축복을 받고도 제대로 못한 인간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 의지를 줘놓고 마음대로 산다고 벌을 내리면서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신보다 한참 모자라고 그 자신도 불완전함 투성이인 인간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이다.
신은 사랑스러운 아벨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아벨을 때려죽인 카인에게 축복을 내리기도 하며,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보기 위해 욥을 시궁창 바닥까지 떨어뜨릴 뿐 아니라, 수시 때때로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벌이곤 했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나의 질문 세례가 끝도 없이 이어지면, '우리가 어리석어서 차마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답변과 함께 '제발 이제 그만 물어봐.'라는 상대의 눈빛을 보게 된다.
그래, 2차원의 '스퀘어'씨 같은 인간이 갑자기 등장한 3차원의 '구'(신은 어쩌면 그보다 더 높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만.)에 대해 그 본질을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갑자기 등장한 3차원의 단면만 간신히 보면서 이해하려 애쓰는 2차원의 존재들처럼, 우리에게 신도 그렇지는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훨씬 더 많은 구의 단면만을 보면서 그것도 제대로 그리지도 못한 단면을 들고 이런저런 종교들을 만들고는 절대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도, 지금도, 십중팔구의 인간들은 기복신앙으로서의 종교를 믿을 뿐이다.
절에 가서 자식의 입시를 빌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남편의 승진을 기도하고, 아픈 가족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것들이 번성하고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나 신은 있으나 마나 하다.
그러다 보니 신은 인간에 의해 끌려 내려와 인간의 욕망을 칠해놓은 존재로 격하되거나, 심지어는 인간 자체가 되곤 한다. 어떤 종교들은 살아있거나 죽은 인간이 바로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평면 위의 2차원 선과 면들은, 켜켜이 쌓인다 해 봤자 구가 될 수 없다.
구의 단면을 본 매우 영특하고 신실한 스퀘어가, 그 뜻을 아무리 잘 이해하다고 해도 전체를 볼 수 없고,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선과 면들에게 전달할 때조차도 오류는 계속해서 쌓여만 갈 것이다.
우리는 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에게 인격화되지 않은 모습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을까? 종교가 말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지난 2천 년 동안에도 끝없이 자기 정체성을 그 시대 인간들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켜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의 변화는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의 변천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야훼뿐 아니라, 십자가 전쟁 시대의 신과, 칼뱅의 하나님, 현대인의 하나님은 결코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다.
이제 우주가 이토록 광활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대엔, 신에게는 인간적이 면이 있다고 해도, 인간적이지 않은 면이 더 많아야만 한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우주인의 면모도 갖춘 신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편애하고, 인간처럼 질투하고, 인간처럼 소유하려고 하는 신을 왜 아직도 믿어야 하나, 언제까지 인간에게 이런 낮은 수준의 종교가 필요할까?
플랫랜드의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정확히 안다고 믿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오류일 수 있다.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의 실체를 단면으로만 보며 상상하듯, 인간은 신의 전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신의 형상은 언제나 부분이며, 왜곡된 해석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신을 가두고, 그 신을 절대화한다. 어쩌면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된 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