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하누 - 어슐러 르귄
《어스시》 시리즈 3권까지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몰입해서 읽었다. 게드의 성장은 단순히 마법사의 여정을 넘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였고, 테나르는 자기 존재를 깨닫고 선택하는 여성으로서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테하누》에 들어서자, 무언가가 뚝 끊긴 느낌이었다. 기대하던 그 세계의 결, 그 인물들이, 같은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물들의 변화다. 테나르는 더 이상 상징적이며 신비롭고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라, 시골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평범한 ‘아줌마’처럼 그려진다. 새매(게드)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의지로 속대와의 대결에 모든 마법을 쏟아부은 그였다. 용을 타고 로크로 녹초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자기가 힘을 모두 잃은 것을 알았다. 그때에도 초연하던 그가 4권에 와서는 자신이 한 일, 그 힘에 대해 “고작 한 잔의 물이었다”며 자조하고, 마법을 잃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같은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의 괴리감이 들었다.
“힘을 잃은 남자는 껍데기만 남는다”는 작중 문구처럼 방황하던 그는, 산에서 염소 치기 하면서 괜찮아졌다는 한 줄 설명으로 나타나서 테나르와 급 연인, 아니 동거남으로 기거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얼떨떨한 전개가 이곳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테루는 가정폭력으로 얼굴과 손, 후두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은 소녀로, 테나르의 사랑으로 조금씩 회복되는 인물인데, 내내 ‘힘을 지닌, 위험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모호한 언급만 반복될 뿐, 정작 인물로서 뚜렷한 인상은 없다. 그러다가 말미에 갑작스레 용을 소환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더 당황스러운 건, 이 장면에서 테루의 능력을 부각하려다 보니, 이전 작품에서 주체적이고 중심적이었던 게드와 테나르가, 평범한 시골 악역 마법사 하나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해 끌려 다니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테루가 용의 힘을 빌어 이들 구한 것은 오히려, 아무리 지혜와 경험이 많고 고난에 굴하지 않는 정신력을 갖고 있더라도 힘이 없으면 무력해진다는 사실만을 강조했을 뿐이다.
여성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단순히 "힘을 가진 여성"을 등장시키는 식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치,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하니까 여자도 같이 담배를 피워야 평등하다고 주장하던 운동권 여선배의 궤변과도 비슷하다. 진실은 “담배는 남녀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이고, 진정한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이 남성과 같은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런 힘의 논리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야기 전체가 이전 권들에 비해 너무 ‘작아졌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르 귄이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건 일상 속의 삶, 침묵, 여성의 시선, 회복의 가능성 같은 주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철학적 주제가 서사와 잘 어우러지지 않고, 오히려 “이미 끝난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더 들게 만들었다.
드래곤볼이나 3x3 eyes 생각이 났다. 일찍 완결시켰더라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텐던 출판사 사정탓인지 이야기를 추가하면서 점점 늘어지고 구질구질해졌던. 테하누도 그런 연장선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다른 세계관에서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이번 편 내가 사랑했던 어스시와는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꼭 나쁘다기보다는, “전혀 다른 톤과 주제를 가진 이야기인데 어스시라는 옷을 입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돌이켜보면, 《테하누》야말로 3권에서 속대가 외우던 그 불멸의 주문처럼, 완성된 것, 끝난 것, 죽은 것을 다시 부활시키려 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마법이 사라진 어스시처럼, 균형을 잃은 이야기였던 건지도 모른다.
르 귄은 어스시 시리즈 내내 “돌 하나의 위치를 바꿔도 세계는 달라진다”라고 말하는 신중한 균형의 윤리를 강조해 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만든 설정이 잘못되었다며 완결된 세계를 다시 불러냈을 때는, 돌이 아니라 산 하나를 바꾸는 것만큼의 파장을 일으켰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새로운 장에서 ,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물들을 써야지, 로크의 마법사들과 왕이라는 균형점이 완성되어 있는 세계를 굳이 비틀어야 했던 이유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녀가 소환한 것은 회복이었지만, 내가 느낀 건 오히려 속대의 주문처럼 세계를 흔들어버린 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