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경계가 그리 멀지 않다면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by 어제만난사람







『평범한 인생』은 은퇴한 철도역장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자서전을 쓰는 이야기다.
그는 평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왔고 대단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겪지 않았기에, 자신이야말로 평범한 삶을 살아온 평범한 인간의 표본이라 여긴다.


19장까지 서술되는 그의 삶은, 수줍음 많은 소목장이의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방황 끝에 철도청에 취업한 뒤 아내를 만나고 성실히 살아온 단일한 흐름의 평이한 인생이다.
그러나 20장 이후 갑자기 전혀 다른 인격, 전혀 다른 말투의 '나'가 나타나서 평범한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수줍고 내성적인 '나'의 성실함은 지적 허영심이나 오만함을 감추는 방패였고, 역장이었던 장인을 이용하기 위해 아내를 유혹한 거라고 말하는 새로운 '나'는 현실적이고 억척스럽고 냉소적이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선형적 회고에서 벗어난다. 사실 인간의 감정이란 건 꼭 하나인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너무 싫지만, 그래도 너무 좋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만난 공사장의 소녀가 이를 잡는 장면에 혐오와 동경을 동시에 느끼고, 어린 시절 경험한 성적인 것들에 매혹되지만 그것이 타락의 길이란 것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남성적이고 강인한 아버지 여성적이고 다정한 어머니가 다툴 때마다 오히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강하고 단단해 보였다는 사실, 시인의 이상 속에는 타락과 몰락에 대한 욕망이 있고, 영웅의 삶 속에는 업적보다 더 귀중한 ‘연대감’의 기쁨이 있다는 것도.


냉철하고 계산적인 자아, 낭만적인 자아, 우울한 자아나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자아, 잠시 세상과 맞섰던 영웅의 자아, 어두운 욕망의 자아, 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거지의 자아까지 - 그가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아들을 마주하며 깨닫는 것은 하나다. '나'라는 존재는 단일하고 명확한 인물이 아니며, 그런 나의 인생 또한 단일한 흐름으로 이어진 서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자아와 몇몇 다른 자아들이 인생을 이끈 듯 보이지만, 어쩌면 시인의 자아가 주도했을 수도 있고, 혹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자아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걸.


불교의 화엄경에서 차용된 인드라망의 비유에 따르면, 제석천이 사는 하늘 궁전에는 끝없이 펼쳐진 그물이 걸려 있고, 그 매듭마다 하나씩 달린 구슬들은 서로의 빛을 끝없이 반사한다. 하나의 구슬 안에는 모든 구슬이 비치고, 동시에 모든 구슬 안에도 그 하나가 비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며,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인공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깨달음과도 통한다.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는 자서전을 완성하려 하지만, 쓸수록 '나'는 더 많은 '나들'로 흩어진다. 단일한 자아가 한 인격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일한 흐름의 삶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슬의 반사된 빛이 각각의 구슬에 비쳐 보인다 하더라도, 그 모든 구슬들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서로를 품고 있음에도, 저마다의 색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소설이 말하는 ‘평범함’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빛깔들이 어우러고 반사되며 만들어내는 조용한 스펙트럼이었다.


자기 앞에 솔직해지는 자는 누구라도 자신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음을 안다.

소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나'라고 하는 존재도 단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범한 인간 속에는 무수한 다른 자아들이 존재한다.
위인의 자서전처럼, 통일된 흐름으로 완성된 삶 같은 건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삶은 시기마다 다른 모습의 내가, 불완전함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이다. 그때그때 주도적으로 등장하는 자아 또한 독자적인 나만의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도 존재하는 억척이나 우울이, 투덜이나 낭만이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속에는 숱한 너와 내가 반사되어 있으니, 나와 너의 경계 그렇게 멀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평범한 이의 인생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흩어진 파편 속에서 반짝이는 면면들은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제각각의 빛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고, 죽음의 느낌이 야기하던 놀라움은 익숙함과 친근함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으로 옮겨 갔다. -14


나는 모든 것을 비웃을 수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웠다. 그로 인해 내가 부정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한없는 우월감을 느꼈던가!

젊은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고, 가질 수 없으면 화를 낸다. 그 때문에 그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을 부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다. - 72


이 뭔가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아득하면서도 놀랍게도 분명한 연관성을 의식하는 순간들은 어떤 신비하고 위대한 것의 현시처럼 묘하게 나를 흥분시켰다. 그 순간들에서 인생이 이해될 때는 아주 드물지만, 인생은 보이지 않는 연관성들로 점철된 심오하고 필연적인 단일체로 나타났다. -86


지금의 나는 가엾은 아버지가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사실은 삶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안다. 절약이란 수동적인 미덕이며, 안정된 생활에 대한 희구이자 닥쳐올 미래와 위기와 우연에 대한 두려움이다. 탐욕이란 잔인할 정도로 우울증과 유사하다. -154


이 세 개의 자아는 말하자면 나의 공식적인, 그리고 결혼 생활과 함께한 삶들이었다.

여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낭만주의자에 관한 것이다. 우울증 환자인 자아의 동료였다고나 할까. 다른 두 자아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억척이는 너무 객관적이며 냉철했고, 평범한 인간은 평범할 뿐이었으며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낭만주의자인 자아는 결혼 생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 자아에 대해 아내가 알아선 안 되었다.

또 다섯 번째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나의 자아도 어떤 존재도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자아를 형성했던 것들은 모두 그것을 꺼렸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나의 자아와 대립했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몰락이나 자기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체를 볼 수 없는 존재였고, 항상 어둡고 은밀하게만 경험될 뿐이었다. 짐승의 악취가 나고 자물쇠가 걸린 더러운 판잣집에서 그랬듯이.

단편으로서만 존재하는 시인, 그가 다른 어떤 자아보다도 그 저급하고 비밀스러운 존재와 상관이 많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시인의 내면에는 보다 높은 뭔가가 있었지만, 그는 나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어쩌면 그 구원받지 못한 것도 내 안에서 영혼이 되어야 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게 영혼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야기들 안에 시인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203-205


이 글이 근사하고 단순한 스토리이며 한 개의 반죽으로 빚어낸 이야기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뻐했다.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표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표상에 들어맞는 사건들은 선별하거나 심지어는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이제 나는 가능성이란 게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213


어쩌면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없는 자아의 분화가 두려워 우리는 분화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우리를 단순하게 해 줄 어떤 집단 자아를 받아들이는 건지도 모른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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