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척하지 않고 살아가기

허송세월 -김훈

by 어제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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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과장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을 감히 추측하지 않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읽은 책은 몇 권 안 되지만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색이 마음에 든다. 글을 잘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느껴질 때 진중하게 부딪히는 무언가가.


늙는다는 것은, “죽음이 배달되듯이 오는” 일. 입원실에서 구토를 참지 못하고, 제대로 씻지 못한 채 버티는 날들은 처절하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지만, 늙어가면서 누리는 시간의 허송이야 말로 존재를 제대로 살아내는 시간인 듯도 하다.

경쟁과 자본주의에 치이며 살아왔던 젊은 시절, 그 밖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닫힌 줄만 알았는데 막상 돌이켜 보면 어떤 순간이건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음을 다 늙고서야 겨우 알게 된다. 시절에 멈춰 서서 나와 세계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약간의 허송세월만 있다면, 좀 더 진짜 나다운 삶을 선택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작가가 자기 말로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쓴다는 태도다. 언어의 담백함 속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확고한 시선이 있고, 자기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있다. 펜을 든 자의 한계는 글을 씀으로써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나는 세월호나 노동자에 대한 그의 의견에 동의했고, 작금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에 공감했다.

하지만 약간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는데, 바로 “노동으로 먹고사는 그날그날”이라는 표현이다.

그 말 자체는 너무나 서글프지만, 동시에 지금 다수의 노동자인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자식을 집에 두고 일하러 나서는 부모들 중에는 등하원 도우미를 둘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고, 남은 아이들에게 문단속과 불조심을 여러 차례 강조해 두고 나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부류 모두 자신들이 '노동으로 먹고사는 그날그날'을 산다고 말할 것이다.

자식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 더 아끼고, 더 버는 삶.


그런데 이 삶에는 '상한선'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계속해서 사람을 조인다.


반면, 작가가 의미하는 그런 노동자들 중에는 기저귀조차 살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사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내가 봉사 활동을 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근로를 소극적으로 하거나,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는 직업이 아닌 (수입이 드러나지 않는) 일만 파트타임처럼 골라서 하고, 나라의 혜택은 모조리 받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일을 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것이고, 도와줄 가치가 없을 정도로 ‘왜 저렇게 살지?’ 싶은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흔히 이들을 계층화시켜서 말할 때에는, '뻔뻔하고 파렴치하고, 거지근성만 남아서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은 거기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본 정치인들은 봉사 장소에 나타나서 조끼 입고, 사진만 찍은 다음, 봉투 하나를 봉사 단체에 건넨 뒤 보좌관의 안내를 받으며 다음 장소로 가 버리니까. 매주 나와서 그 현장을 체험하고 보고하는 보좌관 한 명도 두지 않는 그들이 알 리가 있나. 설령 안다고 해도, 정치색으로 계속 같은 목소리를 낼 것이기도 하고.


정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설령 게으르고 파렴치하고 고약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근로하기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복지 제도가 경제 논리에 따라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처럼, 제도의 한계와 개인의 태도, 인간의 욕망이 얽힌 현실에서 ‘약자는 곧 선하다’는 도식적인 믿음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에 대한 작가의 논조에는 백배 공감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이기심의 파노라마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지, 자신들이 추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모성애와 부성애가 넘쳐난다.

지속적인 괴롭힘에 대한 처벌과 교육을 위해서 만든 학폭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는 신고 현장으로 변질되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 한 번씩 의견이 충돌하거나 싸우면서 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싸워서 마음이 상해서 다시 안 볼 수도 있지만, 남자애들의 경우는 쉽게 화해하고 어울리는 일들도 많은데, 부모들이 오히려 나서서 그 애들을 원수로 만들기도 하였다. 내 아이가 당한다 싶으면 엄마가 먼저 나서서 상대 애한테 찾아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피해자라 호소했다. 자기 자식이 당한 건 억울하고, 상대 아이가 어른인 자신으로부터 험한 소리를 들은 것은 그럴만하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키웠는데 그 아이가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까. mz세대 욕하는 어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키워놓고 욕하는 건 줄 모를 거다.


나는 그런 부모는 되지 않아야지, 수시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키웠음에도 내 아이들을 보면 여전히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데, 그건 내 부족함을 그 애들에게 그대로 쏟아부은 탓이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나도 부족한 부모에게서 자랐고, 내 상처들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무의식 중에 그런 것들이 계속 흘러들어 갔을 것이다.


자식을 낳음으로써 우리는 자기의 진짜 단점들을 거울처럼 마주 보게 된다. 의식 아래에 넣어둔 수치와 비열함과 간교함이, 오만함과 게으름과 숨겨진 분노가 그들에게 시나브로 넘겨지고, 아이의 기질과 동화되며 나를 자극하기까지는 시간차가 꽤 있다. 그래서 그 충돌을 처음 겪을 때는 '얘가 일찍 사춘기가 왔구나' 하겠지만, 사실은 아이의 문제와 내 문제가 함께 거기에 있다. 그리고 충돌을 마침내 잘 넘기고 나면, '아, 자식은 내가 키우면서 나를 키워주는 존재인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자식은 양육하고 보호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부족함을 마주하고 깨어지게 할 가장 훌륭한 스승이기도 하다는 걸.





봄은 사람에게 다가오지만 가을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시계 너머로 간다. 99


'순난'은 어려움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뜻이다. 순난이라는 단어의 형식은 모호했지만, 그 모호한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뜻은 분명했다. 침략전쟁의 후방기지에 동원되어 야만적 수탈 노동에 희생된 죽음은 '순'으로 미화되었고 침략전쟁은 '난'으로 위장되었다.


'순난'이라는 두 글자를 보면서 나는 국가나 민족이 자신의 역사 앞에서 정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했다. 이 위장과 미화는 식민지 철도 개통식에서 제창했던 '황국신민의 서사'나 '기미가요'와 맥이 통하고 있었다.


광복 후에도, 목숨을 수탈해서 목표를 이루는 생산 방식과 건설 방식은 여러 공화국을 거치면서 전승되었다. -118.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일자리가 모자라서 밥 먹기 어려운 시대에 밥 없는 사람들을 밥으로 겁박하면, 사람들은 밥과 죽음의 기로에서 밥 먹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살려고 먹는 밥숟가락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 거듭되는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 동료 인간의 목숨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돌려서 나의 밥을 먹고, 내가 재수 없으면 나의 목숨을 동료 인간의 밥의 토대로 바쳐야 한다면 이런 밥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123,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 자동차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 원이나 5천 원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노동으로 먹고사는 그날그날 속에서 5천 원짜리 밥 세 끼와 아이들 먹는 분유와 군것질, 기저귀와 치약을 잘라 버릴 수는 없다. 더 이상의 퇴로가 없는 한계선에서 인간은 이 보이지 않는 몽둥이와 쇠사슬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다. - 163. 먹기의 괴로움



나는 단지 숫자를 몇 개 누르면 나의 동의 없이도 언제나 나를 호출하는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이동통신 수단을 혐오한다. 나는 이 벨 소리에서 폭력을 느낀다. - 175. 주먹도끼



승용차 유리창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고 써 붙여 놓았을 때, 이 아기는 누구네 집 아기인가. 이 아기는 승용차 주인의 아기이다. 다른 집 아기는 이 '아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속뜻은 '내 자식이 타고 있어요'라는 말이고, 결국 하려는 말은 '가까이 오자 말라'일 터이다.


(...) 어쨌거나 '아이고 내 새끼야'는 세상의 고난을 뚫고 나가는 인간 생명의 강인한 힘이고 본능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살아온 시대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유전병이나 풍토병과도 같아서 부모들은 눈 가린 경주마처럼 제 자식만을 들여다보았고,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관계를 헤아리는 기초적 지성의 시선을 상실했고, 특히 엄마들은 '내 새끼'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완매한 모성의 노예가 되었다.


(...) 지금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학교와 교사를 괴롭혀서 교육의 근본을 파괴하고 사회 계층 간의 적대의식을 고조시킨다. 247~250.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1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람됨은 지나가지 않는다.


- 264.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듣기의 헛갈림은 시작됩니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 인식 밑에 깔린 잠재 욕망일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입니다.


당파성에 매몰된 사람들이 목전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이념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의견과 사실을 뒤섞고 모자이크 해서 내놓는 말들은 이 시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기의 괴로움입니다. 듣기의 괴로움과 말하기의 어려움은 순환관계입니다.


이런 말들은 사회를 추동해 나가는 힘으로서의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군거림과 와글거림을 번져 가게 합니다. -297.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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