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4)

by 별의 여백

꾹꾹 참아내던 것들이 더 이상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르는 날이 있다.


어느 날은 쏟아지는 감정의 사태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릴 때가 있고, 또 어느 날은 그것들을 전부 끄집어내 다시는 꺼낼 수 없는 깊고 진득한 구덩이 속에 진창 파묻어 버리고 싶을 만큼 격정적인 때가 있다.


마치 밀물과 썰물에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내는 펄처럼 켜켜이 쌓인 묵은 감정들은, 예고도 없이 깊디깊은 어딘가로 나를 끌어당겨 가라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목적지 없는 산책을 하곤 한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커다란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꽂고 하염없이 걷고, 걷고, 걷고.

그렇게 걷던 언젠가 인적이 드문 작은 부둣가에 도착했던 적이 있다.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면 시커먼 갯벌이 눈에 들어오고, 정박한 배들은 용케도 무른 진흙에 삼켜지지 않고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나있는 표면의 모습은 아마 그 안에 몸을 숨긴 어느 생명의 흔적이겠지만, 해루질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선 캐내야 할 표적의 흔적일 뿐이었다.


모종삽으로 구멍 난 흙을 정신없이 퍼내다 보면 나오던 다양한 모양의 조개들, 개중에서도 아주 가끔 나오던 진주가 되지 못한 덩어리를 품고 있던 것들.


이미 생명을 다해 입을 벌린 그것들을 헤쳐보면, 그 안엔 미처 진주가 되지 못했으나 여러 색으로 빛나던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드넓은 갯벌 속 작디작은 불순물 하나가 조개의 여린 속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과, 그 불순물을 진주로 빚어내기까지 조개는 얼마나 오랜 시간 온 힘을 쏟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그때의 난 전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 꽤나 깊게 퇴적된 섧고 아픈 찌꺼기들이 나도 모르는 새 내 안에도 꽉 들어차 있었다.


질척거리는 갯벌의 진흙처럼 온 마음에 주렁주렁 매달린 이 감정들 중, 내 안에서 진주로 태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하나쯤 존재하긴 할까.


우습지도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나를 갉아내어 진주를 만들어낼 만큼의 각오는 되어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그것들이 흘러넘친 지금 같은 때에만 불순물 같은 감정들이 내 안에도 있었다는 걸 겨우 깨닫는 중인데.


다만 확실한 건 넘쳐흘러 발목을 잡아당기는 이 감정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버겁고 무겁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난 솟구치는 감정을 그대로 흘려보내듯, 한참을 그렇게 갯벌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잔뜩 휘저어져 흙탕물처럼 혼탁해졌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부유했던 어둔 감정의 찌꺼기들이 침잠해 갔다.


어느덧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의 끝자락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하루 또한 버텨내듯 끝나가는 시간이 되었기에, 나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다시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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