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아주 가끔,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발목을 붙드는 현실의 문제로 차마 멀리까지 떠날 수는 없을 때, 나는 동네 공원 구석에 있는 낡은 벤치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날도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냈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 번화가 한복판을 홀로 걸으며 응어리진 마음을 겨우 녹여내던 날.
한참을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 벤치 앞에 서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 자리는 흙먼지와 낙엽이 내려앉아 몹시도 춥고 외로워 보였다.
나는 잠시 그 쓸쓸함을 내려다보다, 외투의 지퍼를 턱 밑까지 끌어올리고 모자를 뒤집어쓰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미처 동여매지 못한 코 끝을 스쳐 지나갔다.
마르고 텁텁한 가을과 겨울의 냄새 사이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한 다른 시간 속 나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하루 종일 괜찮은 척을 하다 이곳에 와 홀로 눈물을 뚝뚝 흘렸던 나.
감당하지도 못할 일들을 책임지려 안간힘을 쓰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앉아 애꿎은 하늘만 실컷 노려봤던 나.
때를 놓친 어리숙한 감정을 깨닫고 한참을 바람결에 후회 어린 한숨을 흘려보내던 나.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소리 없는 울음으로 한참을 눌러내던 나.
시간이 지나면서 겉모습은 자라났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여전히 미숙하고 유치했던 나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나는 소매 밖으로 손끝을 내밀어 벤치 위를 쓸어보았다.
차가운 나무토막 위로 내려앉은 가장 초라하고 솔직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회색빛 먼지와 부스러기에 섞여 지문 위로 아주 옅게 묻어 나왔다.
툭툭 털어내면 금세 사라질, 찝찝하고 존재감 없는 것들이 나무 결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털어낸 것들을 전부 모아둔 이 벤치를 왜 자꾸만 찾게 되는지, 새삼 그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무언가 울컥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용케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번화가의 왁자지껄한 온갖 소란스러움이, 등 뒤의 키 큰 나무에 한번 걸러져 조금은 먹먹하게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