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맑디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아무런 대비 없이 나선 길이었기에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고, 머리카락은 얕은 비에도 금세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대충 가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오전 열 시. 하루 중 가장 한적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어서일까?
간간히 앞을 지나는 자동차의 바퀴소리만 부스 안을 울리며 잠시 머물 뿐, 그날따라 이곳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정류장 한편 전광판에는 버스 도착 알림이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전광판 옆 기둥에 기대어 서서, 이 앞을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거침없이 달려가는 몇 대의 자동차, 챙겨 온 우산을 쓰고 부랴부랴 길을 건너는 몇몇의 사람들,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가루처럼 흩어지는 여우비.
모든 것이 멈춘 것만 같은 마른 보도블록 위 정류장과, 비어 젖어 짙어진 바깥의 세상은 시간에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젖다 만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애매하게 축축해진 머리카락과 어깨 위를 슬쩍 쓸어보다, 정류장의 경계 밖으로 느리게 손을 뻗어보았다.
차가운 비가 손바닥을 타고 소매 끝을 살짝 적셨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던 같다.
비는 올 때와 같이 예고도 없이 그쳤고, 하늘은 짓궂으리만큼 여전히 맑고 쨍쨍했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디딘 것들은, 그 잠시간의 변덕 덕분에 짙은 비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애매하게 짙어진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류장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아예 푹 젖어들거나, 제대로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못할거면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것들 앞에서 난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들을 뒤집어쓰고 지금처럼 애매하기를 택했던 것 같다.
비를 담뿍 머금어 생기를 뿜어내는 가로수의 옆을 지나며, 그때도 지금도 차라리 젖어버리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잎에 고여있던 빗방울이 약간의 후회와 미련처럼 빰 위를 스쳐 떨어졌다.
이미 그쳐버린 여우비처럼, 갑작스럽게 떠오른 때를 놓친 감정들이 버석한 마음 위에 애매하게 젖어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