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최전선에서 ‘사람의 온기’를 긷다

풀뿌리언론 생존기…윤유경 기자의 <전국지역언론자랑>

by 로켓딴

‘삶과 땀’을 기록하는 지역 기자들의 치열한 분투기

처방전을 받아 들고 어르신과 함께 오전 11시 50분께 들어간 읍내 한 약국.

"아이고, 내 약 좀 먼저 지어주소. 12시 버스 못 타면 다음 버스가 없는데, 우야꼬." 한 어르신이 발을 동동 구르십니다. 병원이 드물고 약국 숫자가 적고 버스편도 많지 않아 벌어지는 마음 아픈 현장, 지역 소멸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입니다.

<경남신문> 2022년 7월 31일자 기사 '맨발의 청춘이다' 중에서


<경남신문>의 ‘심부름센터’ 기획은 기자가 직접 산골 마을 어르신의 약을 타다 드리고, 무거운 짐을 날라주며 그들의 ‘입’이 되는 과정이었다. 윤유경 기자의 신간 <전국지역언론자랑>은 이처럼 서울 중심의 거대 담론에서 비켜나, 지역민의 삶 곁에서 호흡하는 풀뿌리 언론들의 치열한 생존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은 ‘지역 소멸’이라는 차가운 단어 뒤에 숨겨진, 여전히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지역 기자들의 땀 냄새나는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책은 지역 언론이 ‘소멸’을 다루는 방식이 중앙 언론과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보여준다. 부산 산복도로의 가파른 계단 위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저널리즘이 탄생했다. <부산일보> 김준용, 이상배 기자는 호천마을에 ‘산복빨래방’을 열었다.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기자들은 어르신들의 이불을 빨며 부산 근현대사의 질곡을 들었다. 한때 신발 공장 여공으로 일하며 겪었던 가혹한 노동 환경, 그로 인해 지금도 특정 브랜드 신발을 신지 못한다는 한 주민의 고백은 그 어떤 기획 기사보다 강력한 울림을 준다. 이는 기자가 책상 앞이 아닌, 주민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다.


중앙 언론이 ‘이슈’를 쫓아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지키는 것도 지역 언론의 몫이다. 충남 <태안신문>은 2007년 기름 유출 사고 이후 18년 동안 삼성중공업과 피해 지역의 복구 과정을 추적해왔다. 김동이 기자를 비롯한 태안신문 기자들은 당시의 자원봉사 행렬이라는 단편적 이미지를 넘어, 생태계의 치유 과정과 주민들의 피해 보상 문제를 2,000건 넘는 기사로 기록했다. 지역민에게 이들은 단순한 기자가 아니다. 군청 가는 길에 들러 민원을 털어놓고 해결을 부탁하는, 지역의 ‘슈퍼맨’이다.


<전국언론자랑>은 기자의 자격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제주 우도의 유일한 신문 <달그리안>의 기자들은 해녀이고, 민박집 주인이며, 편의점 사장이다.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와 섬이 몸살을 앓자, 주민들은 스스로 기자가 되어 마을의 옛이야기를 기록하고 난개발을 감시하기로 했다. 이들에게 신문은 단순한 소식지가 아니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마을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방패이자 투쟁의 도구다.


책은 이 밖에도 척박한 언론 환경 속에서 피어난 다양한 시도들을 조명한다. 전교생 51명의 괴산 송면초등학교 아이들이 만드는 ‘어쩌다 특종’, 제주도의 외딴 섬 우도의 해녀와 편의점 사장이 기자가 되어 만드는 제주 우도의 <달그리안> 등은 기성 언론이 놓치고 있는 ‘진짜 뉴스’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서울 안에도 ‘지역’이 있음을 증명하는 은평, 금천, 구로의 마을 신문들은 언론의 역할이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내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저자는 “나쁜 언론을 고쳐 쓰겠다는 언론개혁운동은 실패했다. 작지만 좋은 언론을 키워 쓰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라고 단언한다. <전국언론자랑>은 소멸을 걱정하는 이들, 그리고 진짜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희망의 증거다. 지역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곳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파하는 깨어있는 시민과 지역 언론이 살아있는 한 말이다. 지금, 당신이 사는 동네의 언론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작지만 뜨거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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