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직업은 우표수집가

by 로켓딴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우표수집가’였다. 취미(hobby)가 아닌 직업(job)이었다. 체신청, 지금의 우체국이던 체신청의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월급을 모아 어머니가 구파발에 그나마 번듯한 집을 사자 바로 퇴사를 했다.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며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와 결혼했을 엄마의 고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잠깐이지만 엄마는 공무원의 아내로 남편 이름의 집도 가져보았다. 그린벨트에 지은 집은 낡고 화장실도 재래식이었지만 식모도 있었다.

희귀 우표, 오래된 우표도 가치가 있지만 소인과 포장 여부도 우표의 가치를 결정지었다.


아버지는 본인이 공무원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적인 직업을 선호하셨으니 교수나 의사, 박사 같은 걸 하고 싶었겠지만 그런 여건이 안되니 사장, 대표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튼 어머니의 고생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우리집은 망했다. 집의 가구와 가전제품들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고, 곧장 이삿짐 트럭을 타고 방 한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우표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를 차린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좀 나았을까. 전 국민이 우표 수집을 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대통령이 외국 순방 때마다 우표를 마구잡이로 찍어내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우표를 줄 서서 산다고 잡지까지 그렇게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당연히 아버지의 우표 전문 출판사는 계속 부도가 났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른 일을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빚을 어머니가 얻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의미없는 거짓말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아버지가 그런 생산적이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빚을 내고, 결국 집도 날린 것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조차도 그런 말을 아버지에게 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내 주변의 어느 누구의 아버지도 출판사 대표, 심지어 우표 수집 같은 걸 일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오빠를 포함해 다섯명이다. 나는 아들 한명이면 충분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딸을 갖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으로 세상에 나왔다. 나보다 먼저 태어날 뻔 했던 ‘언니’는 ‘닭띠는 팔자가 드세다’는 할머니의 구박 덕분에 엄마 배 속에서 죽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아주 어릴 때부터 들었다. 엄마는 ‘내 덕분에 너가 태어날 수 있었다’혹은 ‘내가 너를 지켰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도가 좋으면 다 좋은 말이다. 더구나 내가 살아남았으니 그러면 됐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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