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가던 날

by 로켓딴
1999.11. 발행

“우리나라 우표를 처음 만들 수 있게 하신 분이 이분이야.”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가 가족 나들이를 가자고 했다. 동네 멋쟁이인 엄마도 차려입고, 나는 얼마 전 사준 ‘여자옷’을 입었다. 오빠 다음으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옷을 물려입었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솜씨좋은 뜨개질 옷들도 처음에는 오빠를 위한 것이었고, 다음은 내 차지였다.

내가 치마를 처음 입어본 날은 6살 무렵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가 엄마는 나를 데려가 치마를 사주었다. 나에게는 너무 크고 길었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두 번째 치마는 무려 백화점에서 샀다. 아버지는 당시 흔하지 않은 신용카드를 만들고, 그걸로 우리 옷을 사주었다. 노란색 웃옷은 내가 처음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세련된 옷을 딸에게 사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워 보였다. 얼핏 가격표를 보며 저 돈이면 우리 동네 시장에서 내가 그렇게 졸라대었던 옷을 10벌도 넘게 살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여튼 아버지는 백화점에서 산 옷을 입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1년에 한번도 가지 않는 가족나들이를 나섰다. 햇살 좋은 4월이었다.

경기도 어디쯤이었을텐데 가는 길이 많이 막혔다. 나는 어릴 때 심하게 멀미를 했다. 나중에 병원에서 비장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같다. 우리집 바로 근처에는 사립국민학교가 있었고, 국립 국민학교는 걸어서 30분 넘게 걸렸다. 오빠는 사립학교에, 나는 국립학교에 보내졌다. 학교는 버스를 타면 5분 거리지만 멀미가 무서워 대부분은 걸어다녔다. 그 정도는 뭐 참을만했다.

아니구나. 당시 사립과 국립의 차이 중 하나가 화장실이었다. 사립학교에는 일찍 수세식 화장실이 도입되었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의 화장실은 그때 온갖 유령 전설이 나올만큼 유명했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꼭 짝을 지어 화장실을 다녔는데 나는 매번 친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화장실은 너무 무섭거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나는 지금도 과민성 어쩌구 증상을 겪고 있다.

다시 4월의 그날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간 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우정국을 도입한 홍영식 추도 행사에 간 것이었다. 그렇다. 조선말기 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그 홍영식 선생님 행사 참석이 온가족 나들이였다. 역시나. 가는내내 멀미를 했던 나는 긴 제례 행사에 얼굴이 하얗다가 노랗다가 했다.

참석한 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어른들이었고 아이들을 오빠와 나뿐이었다.

한참 지나 당시의 사진 2장을 아버지가 가져왔다. 지루한 제례행사 뒤에서 나는 엄마에게 깊숙이 안겨있었다. 고작 3살 차이인 오빠와 나는 어른과 아이 같아 보였다. 홍영식이란 분이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이란 걸 나중에 국사 시간에 알았지만 좋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4월에는 내 생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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