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미래 같은건 없다는걸, 현재를 사는 수밖에
캐나다 2년 살이 하고 돌아와 2달 입원 중
2년 동안 캐나다에 살며 전에 없는 삶을 살다가 지난 6월 귀국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깨달은 덕에 어떤 용기가 생겨 우리는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할 한국에서의 삶, 그것도 둘이 아닌 셋의 완전히 달라질 삶이 두렵기도 했지만, 지난 2년 간 행복을 적극적으로 찾으며 살았기에 두려움보단 기대와 설렘이 컸다. 귀국하고 새로 이사한 집을 정리하며 해외살이 중 미니멀리스트가 된 스스로를 깨닫고 즐겁게 집 정리를 하고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그리웠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떴던 것 같다.
그런데 귀국하고 단 3주만에 나는 입원을 하게 되었다. 지난 여름엔 폭우가 무섭게 왔는데, 내가 사는 지역에 가장 비가 많이 쏟아졌던 날. 배뭉침이 심상치 않아 걱정스런 맘에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조산기가 있어 그 길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8주가 지났다. 안정기라는 임신 중기에 귀국해서 즐거운 몇 달을 보내려고 했는데. 요란한 천둥 소리와 퇴근 후 허겁지겁 달려온 남편의 쫄딱 젖은 모습. 두려움과 불안에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져나온 울음 같은 것이 선명하다.
어떤 날엔 너무나 막막해서 울었고, 어떤 날엔 뱃속의 아기가 걱정되어 울었다. 의료 파업의 상황에서 아기가 세상에 일찍 나오면 치료받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엄마가 힘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마음을 다잡다가도 4일마다 새 혈관을 찾아 링겔 바늘을 새로 찌를 때마다 아프고, 혈관이 점점 약해져 통증이 커져가고, 편안히 잠 잘 수 없고, 몸은 안정적이지 않고, 다인실 입원 생활이 힘들어 지쳐갔다. 내 귀국 후로 잡은 동생의 결혼식에 못가게 되어 울었고, 엄마의 환갑을 직접 만나 축하해줄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내 마음이 힘든건 내 앞날이 무탈할 것을 기대해왔기 때문이란걸 안다.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는데, 내게는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기에 괴로운 것이다.
8주를 지내면서 다행인 점을 하나씩 헤아렸다. 나는 입원해있지만 뱃속의 아가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크고 있다.
내 맘과 달리 자궁이 일찍부터 수축을 계속해서 수축억제제를 24시간 맞고 있지만, 저용량으로도 괜찮아져서 더 많은 약을 쓰거나 큰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더운 여름, 24시간 냉방하며 더위를 모르고 계절을 지난다. 다인실에 환자가 꽉 차서 맞은편 특실의 화장실도 쓸 수 있게 문을 열어줬을땐, 다인실의 건물뷰와 달리 뻥 뚫린 특실 창문으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밥 먹는걸 고민하지 않아도 매일 삼시세끼가 나오고 치워주고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퇴원하고 새 입원환자가 들어오지 않는 날들엔 남편과 편안히 지낸다. 복직하고 너무 바쁜 와중에도 매일 병실에 와 날 챙겨주는 남편의 다정하고 깊은 사랑의 형태를 직접 느낀다.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러운 날엔 지낼만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어떤날엔 버겁고 아프고 어떤날엔 괜찮다고 생각하며 뱃속의 아기를 키웠다.
이제 다음주면 약을 떼고 퇴원을 한다. 약을 떼면 바로 아기를 만나게될까? 며칠 정도 집에서 지낼 수 있을까?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엄마를 한번도 보지 못해서 퇴원 날 엄마를 불렀다. 아기가 바로 태어나면 또 다시 남편만 들어올 수 있는 병원과 조리원에 들어가야하니까.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삶. 이 시간을 통해 아이가 있는 삶을 조금쯤 가늠해보았다. 나 혼자일 때보다 아이가 함께일 때 내 뜻대로, 내 바람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저 하루 하루,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거나 즐거운, 기쁘거나 다행인, 긍정적인 점들을 발견하며 지내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길이라는걸 되새기며 살고 싶다.
아마도 두달 간의 입원 생활동안 마음이 요동친 것 처럼, 늘 다짐대로 되진 않을테지만. 이 시간을 겪지 않았을 나보다는 의연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