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각 Dec 17. 2022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감각

  삼십 대 중반,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면서 충전을 위해 오래 좋아해온 것에 기대어 왔다. 주말 오전 해 드는 침실이나 날 좋은 오후의 공원에서 책을 읽는 것, 만년필에 아름다운 잉크를 채워 일기를 쓰는 것, 요가소년 채널을 따라 요가를 하는 것, 익숙하고 편한 장르의 드라마를 보는 것, 수십개의 화분을 살피고 분갈이를 하는 것. 무언가를 하는 데 어떠한 노력이나 애씀이 없는 편안한 취미들이다.


  그리고 또 종종 새로운 것을 배우며 다른 즐거움을 찾았다. 스물 여섯살에는 회사 앞 발레핏을 배우러 다녔다.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에 1년 정도 다녔는데도 초심자랑 똑같았다. 스물 일곱 살에는 화실에 다니면서 직장인 취미반 수준으로 그림을 배웠다. 스물 아홉 살에는 수영을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 새벽반과 저녁반을 오가며 6개월 정도 배우다가 수영이 늘지도 않고 겨울이 너무 추워 그만 두었다. 서른 살에는 회사에서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아 정적이고 익숙한 취미로는 충전도 되지 않고 화도 풀리지 않아 뜬금 없이 드럼을 배웠다. 생각지도 못하게 박자감각이 탁월해서 그 후 2년도 넘게 드럼학원을 다녔다. 밤 늦게라도 드럼학원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패드를 치고 있으면, 지끈지끈 하던 두통도 어느덧 옅어지고, 나를 힘들게 하는 많은 일들이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기의 회사 생활은 드럼이 지탱해줬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날들이었다.


  그 이후엔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몸과 마음의 힘이 없었다. 연차가 올라갈 수록 회사에서 책임질 일이 늘어 가고 스트레스도 함께 늘어갔다. 결혼을 하고 나니 양가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해주시는데도 해야할 일도, 신경써야 할 일도 늘었다. 예전의 명절이나 공휴일은 충전을 위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는데 그럴 수 있는 날들이 줄었다. 시간이 나면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시간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워보는, 내가 아직은 모르지만 앞으로의 생활을 지탱해 줄 즐거움을 찾기 위해 나설 수 있는 힘이 그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종강을 하고 나니 작은 성취감이 마음 한 켠을 비추는 것 같다. 이곳에서 나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한 과목이 프로그래밍 관련 기초 였다. 과제가 적고 재미 있다는 과목을 추천받아서 넣은 과목이었는데 한 학기 내내 제일로 힘들었다. 손으로 쓰는 것을 좋아하고, 노트북은 대학생 때 이후로는 써본 적도 없는, 최신 기술이나 컴퓨터에 대해 관심도 없고 무지하기까지 한 내가 듣기에 그 과목은 너무도 낯설고 이해해조차 되지를 않았다. 엑셀도 잘 못다루는 내가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코드를 쓰는 것을 배우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을 배우는데 심지어 영어로 배워야 했다. 그 프로그램은 한국에서는 거의 안쓰는 것이라 네이버 같은 곳에 검색을 해도 정보가 없었다. 컴퓨터 적인 사고를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사고 과정이 내게는 모두 물음표였다. '여기서 왜 이렇게 하는거지? 왜 마음대로 하는거지? 누가 이러자고 하는거지? 왜 매번 에러만 뜨는 거지?' 그런 답답한 시간들을 지나 결국 기말고사를 볼 때 쯤엔 이해하게 되었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고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까지 알게 되었다. 매일 이딴 것을 내가 왜 배우고있지! 하던 내게는 너무 큰 변화였다. 나는 여전히 전혀 모르던 것을 배울 수 있는 힘이 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스탠리 파크에서 3시간동안 빌린 자전거를 끌고 걷느라 대여료만 5만원도 넘게 냈던 일을 글로 적었었다. 그 이후 자전거를 타며 밴쿠버의 여름을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차 위에 가족들의 자전거를 모두 싣고 캠핑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자전거를 탈 줄 알았다면 이 여름이 훨씬 더 생생했을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때 자전거를 일단 샀다. 고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 크게 다친 후로 겁이 나 십 년도 훨씬 넘게 못타던 자전거를 일단 사고 나니 용기가 나서 날씨가 맑은 날 학교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처음엔 넘어져서 핸드폰 액정이 깨질까봐 핸드폰도 집에 두고 나가서 연습했고, 발이 땅에 단단히 닿도록 안장을 최대한 낮춰서 연습했지만,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유독 몸을 못다루는 내가 느리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고 해낼 수 있다는게 뿌듯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 모르던 세계로 들어선다. 드럼을 배우니 갑자기 자주 듣던 음악에서 드럼 소리가 생생하게 늘려오고, 드럼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이 보인다. 수영을 배우니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바다와 수영장의 재미가 시작되었다. 어떤 배움은 뒤로 지나쳐 잊혀졌고, 어떤 배움은 내게 드문 드문하게라도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남았다. 몇년 간 그 감각을 잊고 지냈다. 내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이렇게 뿌듯하고 신선한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의 끝에서 내가 그 감각을 다시금 발견했다는 게 기쁘다.


  앞으로는 힘들고 여유가 없더라도 작은 새로움이라도 시도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이십대의 내가 매년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았듯이 말이다. 한동안 내가 생생한 젊음과는 멀어졌다고 막연히 느꼈던 것 같지만,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회식과 모임이 없는 조용한 연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