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2월 중순이다. 올 한 해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감상은 너무나 반복적이지만, 올 해는 특히나 많은 일들이 있어 몇달전의 일이 몇년 전 같고 1년의 끝에 서있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진다.
매년 12월이면 무척이나 바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사람을 만나는 시간에 좀 더 에너지가 충전되는 성향인 나는 항상 많은 사람들과 12월을 보냈다. 대학생 때는 선배들 후배들, 동아리 사람들,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말 모임을 하느라 바빴고, 특히 그 땐 1박 2일로 겨울 엠티도 몇번이나 가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회사 생활을 하는 10년 동안엔 거의 매일 회식이 있었다. 부서 회식, 팀 회식, 전 부서 회식, 전전 부서 회식, 과장님 주재 회식, 차장님 주재 회식 등등.. 회식을 좋아하는건 20%도 안되는 사람일 것 같은데 연말이니까 단합을 위해 회식을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였고, 매일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며 한달을 보냈다. 지난 2년동안엔 모임을 할 수 없었으니 회사에서의 술로 점철된 한달을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게 너무나도 좋았다. 하지만 체력이 남아도 보고 싶은 가족들과 친구들도 만날 수가 없었다. 대신 각자의 집에서 줌을 켜고, 화면 앞에서 먹고 마시며 올 한해도 그럭저럭 지냈다며 마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올 해 캐나다에서의 12월은 남편과 둘이 보낸다. 4시부터 깜깜한 밤이 오기에 여러 개의 양초에 불을 붙이고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으로 벽에 장식한 전구에도 불을 켠다. 연말의 습관인지 맛있는 술과 음식이 자꾸만 먹고 싶어서 와인도, 하이볼도, 위스키도 자주 마신다. 외식을 하기에는 물가가 비싸도 너무 비싸서, 고기나 치즈 같은걸 사서 특별한 식사를 챙겨 먹는다. 이맘때쯤 반복해서 꺼내 보는 영화도 본다.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비긴어게인, 나홀로집에 같은. 평화롭고 안온하다.
그러면서도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무척 낯설다. 먼 나라에 와있는 생활의 생경함 중에서 가까운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다. 정신 없이 떠나온, 1분 1초가 치열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여기에서 지낸 지 6개월 차, 몸과 마음에 여유가 드니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싶다.
나의 유학을 누구보다 축하해준 가족들과 친구들. 이들이 보고싶다. 한국에 있을 땐 무척 바빴고, 각종 모임에도 참석하고, 매일 회사에서 회식을 하느라 지쳐서 오히려 자주 볼 수 없던 몇몇의 '소중한 사람들'이 제일로 그립다. 고요하게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아진 지금, 시간이 넘치는 지금 그리운 얼굴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 관계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명하게 깨닫는다. 1년에 한두 번, 특히 한번은 연말에 만나 1년의 고단함을 서로 토닥이던 관계가 타지에서 제일 그리운 관계라는 것을 느낀다.
영화에서든 책에서든 나이가 들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놓치고 지나온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늘 얘기한다. 이렇게나 원래의 생활에서 동떨어진 다른 시간을 갖게 되니 확실히 알겠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과 지내온 내게 그 관계들도 이런 저런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매일 이어지던 회식은 승진 같은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와중에 더욱 가깝게 된 사람들이 생겨 인생의 친구로 남았다. 그렇지만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어서 그만큼 어느쪽에는 소홀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외국에 있는 나의 안부를 묻고, 내 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들이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느린 연말, 이렇게 느린 겨울 나는 신랑과 둘이서 하기 싫어 하던 운동을 꾸준히 하려 애쓰고, 체력을 쌓고 있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적으니 항상 각종 염증을 달고 살던 몸도 가뿐하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고 내년 여름엔 가족들이 놀러 온다. 친구들도 놀러오기로 했다. 많은 곳에 흩어지듯 사라지던 내 에너지가 내 몸안에 켜켜이 쌓이는 기분이 좋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해서 좋은 컨디션으로 10시간도 넘는 시간을 비행해서 나를 만나러 올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다. 맛있는 것을 만들어 대접하고 좋은 곳을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