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각 Dec 24. 2022

  눈 위를 걷는 동안의 단절된 행복

  지난 밤 눈이 펑펑 내렸다. 폭설 예보가 있어 내일은 아무데도 못가고 집에 있겠다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창밖을 보니 마음 속에서 작은 탄성이 일었다. 생각보다 많은 눈에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눈이 깨끗하게 쌓여있는 모습을 본 건 몇년 만이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나가 새하얀 풍경을 누리고 싶어서 서둘러 모자와 장갑, 방수부츠까지 갖추고 밖으로 나갔다.


  단독주택 처럼 생긴 이 기숙사는 현관을 열면 바로 밖이다. 문을 열고 나가니 눈이 무척 많이 쌓여 있었고 발을 디디니, 발목 위로 눈이 올라왔다. 이런 눈은 실로 오랜만이라서 신이 나 걸었다. 눈을 밟으면 한번에 푸욱 빠지지 않고 도도독 하면서 무게마다 얼은 눈의 층이 걸리며 발이 내려앉았다.



  얼마간 걸어 낮은 동산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새하얗게 덮인 너른 눈밭과 키 큰 전나무에 내려앉은 눈의 모습. 마치 그림그린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고요히 걸었다. 30cm도 넘게 쌓인 눈 위를 걸을 땐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균일하게 발이 빠지지 않아서 중심을 자꾸만 잃게 되어 한걸음 한걸음에 신경을 써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원슈타인과 최정훈이 부른 '눈'이 흘러나왔다. 피아니스트 김준서의 연주와 함께였다. 아름다운 김준서의 선율에 내가 눈을 밟는 소리와 그 때 몸의 움직임만이 느껴지는 시간. 그 하얀 세상에서 고요히 혼자인 것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어느새 진눈깨비가 되어 내리는 눈비에 머리카락이 다 젖을만큼. 아무 생각 없이 눈에 푹 푹 빠지며 걸었다. 언제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거나 SNS로 연결되어 있는 요즈음, 이렇게 단절된 채로 혼자서 걷는 시간이 너무도 낯설고, 행복했다. 걷는 순간에는 딱히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그렇게 한시간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볼이 무척 차갑고 머리가 젖어 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시간이 순식간에 지난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었다. 영화 '소울'에서 말하는 몰입의 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행복의 시간을 누렸다. 하지만 이 시간은 쉽게 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폭설이 내린 날 출근 걱정 없이 그저 새하얀 설경 속을 오래 걸을 수 있는 것. 어느덧 이곳에서 반년을 생활해 일상을 지내고 있지만, 키가 무척 커다란 크리스마스 나무를 바라보며 인적이 드문 길을 걸을 수 있는 이 겨울은 너무나도 비일상이다.


  이 고요한 비일상의 시간, 현관을 열고 나와 쉽게 누린 이 시간을 평생 추억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감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