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다. 요즘 계속 비가 왔는데 한 해의 마지막날이라 왠지 특별한 것을 하고싶던 차에 간만에 구름 아래 밝은 하늘이 비췄다.
얼마 전 캠퍼스를 걷다가 높은 하늘을 유려하게 날고 있는 새를 봤다. 그렇게 높은 하늘에, 날개의 움직임이 거의 없이 호를 그리는 커다란 새의 모습은 영락 없는 맹금류의 모습이었다. 독수리 같았지만 도시에 독수리가 날 리 없다 생각하며 '밴쿠버 독수리' 라고 검색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독수리들이 겨울철 추위를 나기 위해 밴쿠버로 모여든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다는 노스40 보호지역을 가보기로 했다. 군사 보호 구역이던 곳이라 개발이 되지 않은 공원이며 반려견들의 목줄을 풀어도 되는 곳이었다. 새를 발견하면 어떤 새인지 궁금해 하고, 못보던 새를 보면 멀린 어플로 울음소리를 녹음해 기록하는 정도로 탐조 취미가 약간 있고, 큰 댕댕이들이 많은 공원을 걷다가 운이 좋으면 사람 좋아하는 댕댕이를 한 번 쓰다듬는 날엔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 나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딱 좋은 곳이라 생각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멀린 어플에 기록하고 있는 직접 만난 새 목록
30분 정도를 달려 공원 입구로 들어서자 당장 나무 꼭대기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세 개 의 덩어리는 흰머리 독수리(Bald Eagle) 였다. 가슴이 뛰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날 것의 자연 같은 공원이 있고 너무나 멋져 여러 곳의 상징으로 쓰이는 독수리가 이렇게나 쉽게 보이다니, 실제로 가까이에서 본 독수리는 정말로 멋졌다. 차에서 내려 조금 걷는데 독수리들이 머리 위로 날았다. 아래에서 본 독수리는 1미터도 넘어보였고, 날개 끝은 갈라져 살짝 위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적은 움직임으로 날아 키 큰 나무의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 앉는 모습에 설렜다. 어떤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 황홀하다 생각한 적은 자주 있지만 심박수가 올라가고 열기가 퍼지는 느낌은 드물었다. 그런 드문 가슴을 안고 쌍안경을 들고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두번째로 심박수를 올린 풍경. 밴쿠버 어디든 대형견이 뛰논다. 그런데 이 공원은 대형견이 모이는 명소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댕댕이들이 있었다. 리트리버보다 큰 견종들은 자주 보긴 어려운데, 이 공원에 다 모여있었다. 복슬복슬하거나, 날렵하거나, 올블랙에 카리스마 넘치는 댕댕이들이 걷거나 뛰고, 서로 어울리고 있었다. 하늘엔 흰머리수리가 날고, 땅에는 커다란 개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풍경에 단순하게 즐거웠다.
오전에 비가 와서 땅은 진흙이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개들은 어김 없이 물웅덩이로 뛰어들어 털을 적셨고, 이 공원으로 산책나온 견주들은 이럴 것을 예상하고 온 듯이 침착했다. 나와 신랑은 처음부터 수많은 수리를 봐서 이제는 올빼미와 부엉이를 찾아보기로 했다. 황량한 겨울 나무의 꼭대기에 누구의 눈에라도 띄게 앉아있는 수리와 달리 올빼미는 안보이게 숨어 있다고 해서 겨울 숲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모든 나뭇 가지를 눈으로 살폈다. 종 종 발이 물웅덩이에 빠졌고, 종종 댕댕이들이 다가왔고, 웃는 눈으로 댕댕이를 바라보면 견주가 인사를 했다. 가까운 높이에 수리가 앉아 있으면 쌍안경으로 자세히 바라보다 사진에 담았고, 수리가 나는 것을 발견하면 멀어져서 안보일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숲 속을 정처 없이 거닐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남편과 나는 그제서야 우리가 순수한 몰입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했다. 비 온 숲의 냄새를 맡고, 호기심이 생기는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아름다운 생물의 모양을 자세히 바라보며 감탄하는 일.
어릴 때는 골목 친구들과 줄지어 가는 개미를 구경하고, 아카시아 꽃을 따서 단 맛을 보고,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떼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들을 쫓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들에 어떤 목적이 있었나?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더 발전해야 한다는,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나? 그 시간들은 그저 즐거움이었다.
그저 즐거운 시간은 어느새 내겐 멀리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잘 살기 위해 경쟁 사회에서 끊임 없이 열심히 살아온 나는 취미 생활을 하거나 휴식을 할 때에도 마음 구석에선 이 시간으로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판단했다는 것을 안다. 겉으로 보기엔 무용해 보일 지라도 나에게 어떤 쓸모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선택해왔다는 것을 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그 강박이 순수한 즐거움을 조금쯤 바래게 했다는 것도.
한 해의 마지막날이니까 특별한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그랬다. 쓸모 없이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아주 아주 멋진 독수리를 실컷 봤으니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두시간동안 내가 누린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도 재지 않고, 그저 무언가가 궁금하고 가슴이 설레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발이 다 젖는줄도 모르고 집중했던 시간을 누린 것이다.
연말에는 항상 새해에 계획했던 것을 이루었는지, 나는 얼마만큼 나아졌는지, 어떤 점이 발전했는지, 책을 총 몇 권 읽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올 해는 다르다. 내가 얼마만큼 행복했는지, 어떤 순간 순수한 즐거움을 발견했는지, 무엇을 할 때 마음이 따뜻했는지 같은 것을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이렇게 넉넉하고 좋아진 마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다고 적었다.
수리와 올빼미, 커다란 댕댕이를 보러 그 공원에 자주 가고 싶다. 새 해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설레는 기분으로 자주 걷고 싶다. 그런 시간을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