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이유가 남동생과 편안히 대화하는 영상을 보았다. 남동생이 아이유에게 요즘 행복하신가요? 라고 물었다. 이에 아이유가 대답했다. 슬픈 일이 없고, 내가 화나는 일이 없으면 행복하다 여기기로 했다고. 아아 너무 행복해~~>_< 하는 행복도 있지만, 무표정한 행복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담담한 아이유의 말에 나는 그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살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무엇인가를 해내고자 마음을 먹으면 대체로 해냈다. 학생 땐 열몇시간씩 공부했고,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48키로였던 시절도 있다. 시험에 합격했고, 지난 해에는 승진도 했다. 유학도 나왔다. 유럽 배낭여행도 했고, 각양각색이라 같이 오래 있으면 싸우는 가족들과 가족여행도 몇번 추진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마음을 썼다. 그리고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 중 배우자에게 제일 잘해주기로 결심했고, 때때로 부딪히더라도 제일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지난 시간을 성실히 지내면서 나에 대한 믿음을 쌓았다. 나는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그 과정에 나는 어땠나? 많이 울었고, 자주 아팠다. 눈물이 날만큼 행복할 때도, 무척 즐겁고 신날 때도 있었다. 화가 나있을 때가 많았고, 바빴다. 대체로 힘들거나, 대체로 기뻤다. 무표정한 시절은 별로 없다.
낯설게도 요즘 무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학 나와 첫 학기를 마쳤고 내일부터 다음 학기가 시작된다. 3주라는 짧은 방학, 10년만에 경험하는 첫번째 방학에 나는 아무 여행도 떠나지 않았고 4시부터 밤인, 거의 비가 오는 밴쿠버에서 지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9시나 10시였다. 요거트나 과일을 조금 먹고 커피를 내렸다. 책을 읽고 싶거나 글을 쓰고 싶으면 향초에 불을 붙이고 음악을 켰다. 촛불을 켜면 책이 잘 읽혔다. 올 해 유행하는 드라마를 거의 다 봤다. 최근에는 재벌집 막내아들과 웬즈데이를 봤다. 이틀에 한번은 한시간씩 산책을 했다. 방수가 되는 부츠를 사서 자주 걸었다. 요가를 하고 수영을 했다.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안다. 사소한 걱정은 있지만 큰 걱정은 없는, 슬퍼할 일이 없는 시기는 드물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에 이런 안온한 방학을 보낼 수 있다는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내가 소중한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의미 있거나, 더 행복한 일을 해야하는거 아닐까?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기분이 가라앉아 영어 회화라도 연습하거나 읽기 어려운 철학책을 펼쳤다.
이런 내게 무표정한 행복이라는 말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살며시 미소 짓는 표정으로 지낸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위경련도 없고 소화도 잘되고 몇달 간 화장도 못하게 했던 염증들도 사라졌다. 몸이 가뿐하다. 이렇게 몸이 아프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별 탈 없이 무표정한 행복을 느끼는 지금은 어쩌면 내가 앞으로의 인생에서두고 두고 추억할 좋은 시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 불안을 멀리 해보기로 한다.
요즘 읽고 있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라는 서양인 승려가 쓴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마음에 닿아 밑줄을 그은 구절들도 다시 돌아보니 지금 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내가 이 겨울 방학에 무엇도 계획 하지 않으면서 바랐던 것은 이런 시간이었나보다. 책의 구절을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친다.
'하지만 자제력만으로 더는 해낼 수 없는, 아니 해내고 싶지 않은 날이 옵니다. 한 사람의 일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더 깊은 부분에 자양분과 활력을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 유형의 자양분은 흔히 성공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에서, 자신의 업무가 의미 있고 자기 재능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바뀌게 한다는 느낌에서 나오지요.'
'인간 내면의 평화로운 것, 고요하고 차분한 것, 자꾸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중하며,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겁니다.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현재에 집중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신뢰하며 살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생각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의 현실에 더 깊이 뿌리 내린 소중한 것들을 탐지하는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