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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Feb 12. 2023

설산을 오르는 일

캐나다 겨울왕국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 속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근육을 쓰며 힘든 것을 좋아하지 않은지 오래다. 십년도 더 전 어린 고등학생일 때도 수학여행에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 등반과 둘레길 산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을 때 조금의 고민도 없이 둘레길 산책을 선택했던 나다. 그런 내가 즉각적으로 기분을 전환시키고 싶은 날엔 설산에 가고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밴쿠버의 비오는 겨울은 길다. 11월부터 5월까지 비가 오는데 왜 밴쿠버가 살기 좋다고 하는지 몰랐다. 보니까 겨울엔 다들 스키장으로 간다. 추운날에도 영하 1도정도밖에 안되어서 눈이 오는게 아니라 비가 오는데, 워낙에 산이 많고 고도가 높다보니 비 오는 날에도 차로 산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눈으로 바뀌고 키 큰 캐나다나무가 눈으로 덮인 겨울왕국이 펼쳐진다. 집에서 1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스키장들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스키장에 갈 수 있으니 사람들은 시즌권을 끊어놓고 일주일에 두번씩은 스키장에 간다. 유학을 나온 한국인들도 대부분 스키를 타러 간다.


  나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을 못한다. 운동신경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전거를 배우는 것도 한참, 수영을 다닐 땐 접영을 배우는 고급반으로 올라가려면 강사님이 보내줘야 했는데 자꾸 탈락시켜서 중급반에서 평영만 3달을 배웠다. 스릴을 즐기지 않아 놀이공원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이 다 스키장에 갈 때도 납작한 땅에 붙어 강아지들을 구경하며 산책을 다녔다.


  하지만 빼곡한 침엽수가 눈으로 덮인 풍경은 보고싶었다. 알아보니까 스키장이 있는 산들은 여름엔 하이킹 장소로 유명한 산이라 겨울에도 하이킹을 할 수 있었다. 스키다니는 친구에게 그 산에 하이킹을 갈까싶다 하니 꼭 필요하다면서 아이젠과 등산스틱을 빌려주었다. 등산에 대해 무지해서 그런게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아침에 옷을 챙겨입었다. 쇼핑이 어렵기도 하고 특별히 겨울 등산복을 사야할 것 같진 않아서 히트텍, 긴팔요가복, 간절기용 아웃도어 자켓, 야상을 차례로 겹쳐 입고 방수부츠를 신고 털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의류를 한번에 입고 산에 가는게 우스우면서도 기분이 산뜻했다.


 밴쿠버 시내에서 멀지 않은 시모어 마운틴의 도그트레일(Seymour Mountain Dog trail)이 첫 산행 장소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차로 산을 오르고 오르다보니 어느새 새하얀 겨울왕국이 나타났고, 스키장 입구 옆으로 나있는 트레일 입구로 들어섰다. 몇걸음 걷자 탄성이 나왔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불과 몇분 전 스키를 타느라 상기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성소리를 들으며 걸었는데, 빼곡한 나무와 높이 쌓인 눈이 소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인지 마치 단절된 세상같았다.


아름다운 풍경, 숨죽여 걸어야 할 것 같은 고요.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눈 사이로 사람들이 다녀 생긴 좁은 길. 길 바로 옆은 가팔라서 굴러떨어질 수 있어 집중을 하고 한걸음 한걸음 옮겼다. 눈때문에 걷기 어려워서 근육과 정신이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한 느낌이었다. 특히 가파른 곳을 오를 땐 등산스틱에 의지해 몸을 끌어올렸고, 시야가 트인 곳이 보이면 머물렀다. 호흡이 가빠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느끼며, 몸이 데워지는 것을 인식하면서 걸었다.



  걷다보면 종종 개와 함께 한 사람들이 바로 뒤에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눈치 못채다가, 설산 등산이 처음인 우리의 느린 속도에 뒷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길을 비켜주었다. Enjoy, Thanks. 작은 응원을 건네며 서로 미소지었다. 가볍고 빠르게 걷는 개의 뒷모습을 보며 힘을 더 냈다. 그렇게 한시간 반 정도를 걸어 우리의 목적지인 뷰 포인트에 도착했다. 빽빽한 침엽수림을 걸었는데, 밴쿠버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탁 트인 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선보다 낮은 곳에 구름이 흘러가고, 물이 흐르는 도시를 구경하며 보온병에 담아온 차를 마셨다. 차의 이름이 First Frost(첫 서리)인데 안개와 구름이 섞인 눈덮인 전경을 바라보는데 그림처럼 어울렸다. 산을 오르느라 더워진 몸이 식고 있는데 따끈하고 향긋한 차가 목을 넘어가니 마음 속까지 훈훈하게 행복했다. 차를 마시며 머무는 동안 사람들과 개를 구경했고, 행복한 듯 눈밭을 구르는 모습에 내 마음도 좋았다. 전망이 제일 좋은 자리에 개와 중년의 여자가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너무나 동화같아서, 내가 지금 현실에 있는건가 싶게 감각이 흐릿해졌다.


  

  가만 가만 풍경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있으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엔 소진된 근육이 제 역할을 못해 후들거리고 미끄러지며 힘들었지만. 등산스틱에 의지해가며 한걸음 한걸음 애써 옮겼다. 총 3시간의 설산 산행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특별히 한인 식당에 찾아가 뜨끈한 순대국밥에 막걸리를 마셨다. 회사 다닐 때 점심에 주3회는 순대국밥을 먹는게 지겨웠는데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이런 걸 매일 먹을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한 곳에 살았던 것이다.


  다음 날 온몸이 두들겨맞은 것 같이 아파서 꼼짝 없이 누워 하루를 보내면서 생각했다. 겨울 산에 자주 가야지. 봄이 오고 눈이 녹기 전에 더 자주 이 고요와 몰입의 순간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평온을 바라보아야지.


  요즘 또다시 주거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영어로 수업 듣고 매주 숙제하고 팀 과제를 하는것이 버겁고, 한국에 두고온 문제들이 걱정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백색의 숲 속에 들어서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잠시 날아갔었다. 가쁜 호흡때문이든, 집중을 하지 않으면 미끄러져 다칠 것 같기 때문이든, 풍경이 너무 이국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든 그 3시간 동안엔 어떤 것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잠시 현실을 떠났다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겨울 산 속에 있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늦기 전에 알게 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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