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을 열면 바깥으로 바로 나오는 2층집 타운하우스에 살다가 3층에 위치한 12평으로 이사하면서 좋은점은 월세를 600불씩 아끼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월 600불이면 총 800만원 넘는 집세를 아낄 수 있기에 이사를 결심한 것이다. 2월에 기숙사 재신청을 하고 배정을 기다리다가 4월 중순이 넘어서야 우리가 이사갈 집이 어딘지 연락이 왔다. 그 메일을 받자마자 서둘러 3층으로 향했다.
이 기숙사 단지는 디귿자 모양으로 되어있어서 집마다 창문의 위치가 다르고, 공사장과의 거리가 다르다. 밴쿠버 학교 바깥의 집세가 급격하게 올라 원룸의 월세가 250만원을 넘고, 투룸의 월세는 350만원을 넘는다.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코로나 시절부터 기숙사를 아주 많이 짓고있다. 학교 전체가 공사장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데, 살던 집의 맞은편 옆 옆 건물을 짓고있어서 아침 7시 30분부터 공사소음이 있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사장과 떨어진 정도였다. 두달간 '공사장 바로 앞만 아니면 좋겠다. 운좋게도 디귿자의 한가운데나 끝쪽이어서 멀면 좋겠다'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배정받은 호수는 3층 제일 끝, 공사장 바로 앞이었다. 60개의 방 중 2개뿐인 맨 끝 방에 걸리다니. 잠깐 좌절스러웠지만 밴쿠버에 와서 세번의 이사를 하고 정착할 곳이 생겼다는것 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것을 지난 1년간 깨달았기에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지난 금요일 이사를 했고, 이 집에서 지낸지 열흘째이다. 열흘동안 나와 남편은 이 집이 지난집보다 좋은점을 자꾸만 발견하게 되어 놀라는 중이다. 이사 첫날, 요리가 취미이며 장비병이 있는 남편은 주방 수납이 반으로 줄어 짜증스러운 상태였다. 언제나 감정기복이 없고 '어떻게든 되겠지' 라거나 '별 수 없지'라는 말이 입버릇인 그가 국자가 걸려 안닫히는 서랍을 쾅쾅 거리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 공사장 바로 앞 방에 배정되어 우울한 내게도 '이 비싼 도시에서 나름 싼 값에 살 수 있는 집을 얻은게 어디냐, 그림처럼 원하는 모든게 이루어지는 게 확률적으로 낮은 일이다'라고 말하던 그였지 않은가. 이례적으로 짜증난 그의 모습에 서둘러 이사 다음날 이케아에서 주방용 트롤리를 사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꾸만 좋은점이 느껴졌다. 제일 좋은 점은, 우리가 부지런해진다는 것이다. 나와 남편은 '와식 인간'으로 언제나 누웠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잠들때까지 눕지 않던데, 나와 남편은 침대에도 소파에도 누워있었다. 심지어 신혼집 거실에 토퍼를 깔고 그 위에 러그를 깔아 눕기 좋게 살았다. 그런데 12평집은 누워있기엔 집안의 상태가 너무나도 한 눈에 보인다. 소파에 누워서도 2인용 식탁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이 눈에 보이고, 주방의 싱크대 위가 보인다. 침대에 누우면 벽장 속과 서랍장 위가 보인다. 나는 정리정돈을 나름 좋아하는 사람인데 물건이 조금만 늘어져있어도 집이 어수선해서 자꾸만 몸을 일으켜 물건을 치운다. 어수선했던 정도에 비해 5분만 움직여도 집이 금새 말끔해져서 힘들지도 않다. 청소가 쉬우니 자꾸만 움직인다. 이 얘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늘 건강하게 날씬한 친구들이 자기들은 엉덩이 붙이고 있는 때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많이 먹지도 않고 운동도 늘 꾸준히 해왔는데 왜 그들과 다른가 늘 의문이었는데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운동하는 1시간 빼고는 늘 누워있었다는 것. 일할 때는 늘 앉아있고, 집에선 필수활동 외에는 누워있던 내가 이렇게 움직이다보면 살도 빠질 것 같다. (희망사항인가)
두번째, 생활력을 기를 수 있다. 정리를 잘 하는 능력과 창의력이 오르는게 느껴진다. 처음 이사왔을 때는 화장실 바닥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도무지 이 집에서 쾌적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800만원을 아끼지 않아도 되면 좋았을까 하고 끝도 없는 비교의 늪에 빠질 뻔 했다. 그런데 정리전문가의 영상을 보고, 이케아 쇼룸을 꼼꼼히 구경했더니 감이 왔다. 전에는 이케아 쇼룸을 대충 구경했어서 옷장이나 서랍, 싱크대 서랍을 열면 자신의 집에도 똑같이 구현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모든 곳이 한정된 공간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지 알려주고 있었다. 열어볼 수 있는 곳을 다 열어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꼭 필요한 수납용품을 몇개 사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집을 정리했다. 신기하게도 벽장과 침대밑에 옷과 캐리어, 이불 수납이 말끔하게 끝났고, 4단 선반으로 취미용품과 차를 꽉채우는 캠핑용품이 정리되었으며 수납함과 트롤리의 도움으로 주방용품 정리도 끝났다. 침대 배치도 바꾸고 S고리나 도어후크를 활용하는게 재미있었다. 가지고있던 패브릭들을 걸으니 우리집 분위기가 났다. 1년간 이렇게 고민하며 정리정돈하면 한국에 가서 어떤 집에 살든, 아이가 생기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세번째로는 미니멀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서 돈도 아끼고 환경보호에도 조금쯤 힘을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이사 첫날부터 매일 중고거래 단톡방을 통해 물건을 비웠다. 그리고 옷장정리를 위한 수납용품들만 들였다. 별다른 고민없이 대충 샀던 물건들은 쓰면서 불편한 점들이 있거나, 아예 쓰질 않아서 이번 기회에 비웠다. 이제는 물건을 들일 공간도 없기에 물건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예를 들어 침구 정리를 위한 청소솔이 따로 있는데, 욕실 머리카락 정리를 위해 가지고 있는 돌돌이가 있으면 청소솔이 없어도 되고 선물받은 전동 와인오프너는 비우고 작은 와인오프너만 쓴다거나. 물건을 버리거나 새로 사기 전 리폼해서 쓰는 방법을 고민한다거나. 사실 우리 부부는 취미가 많아 가진 물건이 많은 편이지만 이제는 어떤 즐거움을 위해 정말로 꼭 필요한지를 전보다 잘 헤아려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난방과 채광이 다르다. 2층 타운하우스에서는 아무리 난방을 올려도 집이 추웠다. 특히 아침에 1층 주방에 내려가면 너무 추워서 패딩을 입어야 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전의 집이랑 똑같은 온도로 맞췄는데 금새 후끈해져서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창문 블라인드를 다 올려놓으면 북서향임에도 불구하고 집이 환하고, 해가 지는 시간에는 주방까지 빛이 든다. 넓은 집에서는 거실 언저리까지만 해가 들텐데 집이 좁으니 온통 빛이 닿는다. 남동향이던 기존집보다 북서향인 지금 집이 더 밝고 따뜻하다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역시 좋은게 다 좋은게 아니고 나쁜게 다 나쁜게 아니라는 명언이 오래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있다.
헤아려보니 집이 좁기 때문에 있는 장점이 많다. 여기에 더해 걱정했던 것보다 집이 훨씬 조용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인 듯 하다. 원래 집 방향이 아니라 반대편에 위치한 것 만으로도 공사하는 건물 바로 앞인데도 공사소음이 훨씬 덜하다. 두달 간 어떤 집이 배정될 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막상 살아보니 미리 걱정했던 나쁜점은 생각보다 괜찮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좋은점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환경이 변화할 일이 별로 없어서 어떤 변화가 있기 전부터 불안했다.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집을 네번이나 옮겨다니고 온갖 새로운 상황들을 마주하다보며 살다보니 걱정했던 것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요즘, 이 집에서 좋은 점들을 더 많이 발견하고 내 안에 쌓아 어떤 상황에서든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