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요일 밤에 잠들 때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벤치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밴쿠버의 여름엔 토요일 오전 어디에서든 팜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아침을 간단히 챙겨먹고 30분을 걸어 팜마켓에 가면 여름의 태양을 한껏 받아 달아진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다. 일주일 동안 신선한 먹거리에 감탄한다. 어떤 채소와 과일을 사서 단순한 즐거움을 느낄지 생각하며 잠든다.
토요일 오전,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고 에코백 하나를 다른 에코백에 넣어 두개를 들고 집을 나선다. 차도 사람도 많지 않고 햇빛이 커다란 나무의 커다란 잎을 비추는 것을 바라보며 30분을 걷는다. 걷다보면 길가에 산딸기처럼 생긴 열매가 많이 열려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 캐나다 사람들이 길을 걷다 그것을 따먹는다. 어떤 아버지는 2살 남짓 되어보이는 어린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멈춰서 열매를 따 아이에게 준다. 헬멧을 쓴 귀여운 아이는 열매를 먹는다. 그런 장면들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장바구니에 꽃과 채소를 담은 사람들이 걸어나온다. 팜마켓에 도착했다.
소박한 팜마켓에는 하얀색의 부스들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 여름 채소와 과일이 쌓여 있고, 빵을 파는 사람, 꽃을 파는 사람, 손수 만든 장신구나 그릇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한켠에선 통기타나 우쿠렐레를 치며 노래하고, 나무로 된 식탁 근처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아이들은 뛰논다. 해맑은 표정의 강아지들이 많다. 적당히 붐비는 소박한 팜마켓의 모습에 평온한 행복을 느낀다.
요즘에는 항상 샐러드 채소를 산다. 상추처럼 생긴 채소들이 어찌나 싱싱한지 흙이 그대로 묻어있고, 냉장고에서 일주일이 지나도 그대로 싱싱해서 마트에서 사는 채소와는 맛이 다르다. 그리고 그날 그날 사고 싶은 다른 채소를 산다. 오늘은 한국에서 보던 크기보다 작은 가지의 짙은 보라색이 예뻐 세개를 집었다. 손으로 잡으니 단단하여 갓 딴 것이라는게 느껴졌다. 가지구이나 어향가지를 해먹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노란색 감자만 눈에 띄는데 붉은색의 감자가 있어 네 알을 샀다. 한국에서 언젠가 작은 홍감자를 쪄먹어봤는데 카스테라 감자라도 불린다더니 정말로 부드럽고 파근 파근 했다. 그 감자랑 같은 것일까 싶어 샀다. 밴쿠버에서는 칠리왁 지역의 초당옥수수가 유명한데, 찰기가 있고 달다고 써있는 옥수수를 두 개 샀다. 까보니 찰옥수수다. 강원도가 고향인 나는 여름이면 시골에서 한박스씩 보내주시는 옥수수를 먹고 살았다. 모든 가정이 그렇게 옥수수를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남편과 결혼하고 옥수수를 먹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옥수수를 손질해서 잔뜩 삶아 냉동한 것을 택배로 보내주신 엄마 덕에 결혼 후에도 옥수수를 먹었다. 떠올리니 얼른 삶아 먹고싶다. 몇주 전 캐나다의 유명한 과일 산지인 오카나간 호수 쪽에 캠핑을 갔다가 3박 4일 내내 그지역의 복숭아와 체리, 자두를 먹었다. 오카나간에서 온 과일 가판대에서 검은 빛의 자두를 샀다. 껍질은 얆고 과육이 붉은 자두보다 달고 신맛이 덜한 자두라 맛이 좋다.
그렇게 과일과 채소를 눈으로 보고 고르며 간단히 삶거나 굽거나 씻어 먹는 것을 생각하니 즐거웠다. 밴쿠버에서는 한국의 김밥천국처럼 많은 가게가 조각피자와 햄버거 가게이다. 피자 한조각과 콜라 한 잔이 세트로 3~4천원 정도, 햄버거 한 개가 4~5천원 정도로 저렴하다. 그 외의 가게들은 모두 비싸다. 서브웨이 반개 단품만 먹어도 만원 정도이니 간단하고 저렴한 끼니는 피자와 햄버거인데 간이 내게는 너무 짜다. 그런데 여름의 감자, 옥수수, 과일들은 제철이라 유난히 달고 고소하고 보드라워 맛있으면서 가격 부담이 덜해 요즘의 식탁을 주로 채우고 있다. 5월부터 9월 또는 10월까지 매 주말 열리는 팜마켓이 도처에 있어 갓 수확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게 감사하다. 11월부터 매일 비가 오고 팜마켓도 열리지 않아 마트에서 채소를 사먹는데 팜마켓에서 산 것과는 아예 다르다. 며칠 냉장고에 있다보면 금새 물러 먹을수가 없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식재료를 사 요리하는 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깨달았다. 좋은 식재료는 그 자체로 훌륭하게 맛있다는 것을, 좋은 식재료는 제철에 갓 수확한 것이라는 것을. 늦은 퇴근을 하고 어플을 켜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던 시절엔 몰랐다. 맵고 짜고 단 음식들을 먹던 시절에는 제철 식재료의 섬세하고 은은한, 훌륭하게 맛있는 맛을 몰랐다.
에코백 두 개에 과일과 채소를 나눠 담아 양쪽 어깨에 메고 3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겁지만 발걸음이 가볍다. 마트의 과대 포장 없이 둘이 일주일 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만의 과일과 채소를 골라 살 수 있는 지금, 건강한 끼니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는 게 문득 감사하다. 여름의 맛 덕분에 식탁이 단순하고, 가볍고, 섬세하다. 자연스럽게 식습관이 바뀌어 간다. 건강한 삶을 체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