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의 독서 에세이 '책과 우연들'에서 읽은 얘기에 마음이 솔깃했다. 과학책이라곤 절대 읽지 않고 주로 문학만 읽어온 편식 독자인 나처럼 그녀는 어릴 때부터 과학책만, 비문학 서적만 읽는 편식 독자였다고 했다. 나는 현실 세계에 발 붙인 문학만 읽어왔고, 한국의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은 내 편식 선택 속에 들어오는 범주였기 때문에 습관처럼 펼쳤다가 과학책만 읽어온 그녀가 만들어낸 SF 판타지에 빨려들게 되었다. 그녀가 그린 SF의 소재들은 오랜 시간 자주 다루어진 내용이라고 하지만, 나는 완벽한 편식 독자였기에 그녀가 보여주는 소설 속 세상은 나에게는 낯설고 즐거운 판타지의 세계이다. 내게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해 준 그녀는 작가가 되고는 우연한 책과의 만남이 세계를 한 걸음 확장시켜주는게 좋아서 일부러 낯선 책을 고른다고 했다. 특히 출장이든 여행을 가면 그 도시에 있는 작은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고르고 그 지역에 머무르는 동안 그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러면 나중에 그 곳을 생각하면 그 때의 책 속 세상이 함께 기억된다고 했다. 낭만적이다.
한국에서 살 때 독립 서점에 들어서서 현실적인 고민들은 잊고, 작은 서점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을 한권 한권 음미하는 재미를 사랑했다. 대형서점과 달리 작은 규모의 독립 서점에는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의 취향과 시선이 생생하다. 한 권 한 권 제목과 책방 주인의 소개글을 읽고, 표지나 종이의 질감을 감상하다가 갖고 싶은 딱 한 권의 책을 사들고 나왔다. 그렇게 공주에서, 부산에서, 제주에서, 대전에서 고심해서 고른 책들은 나의 오랜 취향을 안고 책장 한켠에 놓여 있다. 캐나다에 와서도 오래되고 작은 중고 서점에 들어가 손때 묻고 빛 바랜 책의 물성을 찬찬히 느끼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영어로 된 제목과 소개글은 마음을 움직일만큼 와닿지는 않아 잠시 책을 사는 즐거움을 내려놓았다.
그런 와중에 김초엽 작가의 글을 읽고 다음 번에 서점에 가면 소설 서가가 아니라 다른 서가에서 서성거려보자 생각했다. 어쩌면 낯선 우연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지난 추수감사절 연휴에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단풍 여행을 다녀왔다. 캐나다는 단풍국으로 유명하지만, 내가 사는 밴쿠버는 밥아저씨가 주로 그렸던 키 크고 빼곡한 침엽수가 많고, 우리가 알고 있는 커다란 단풍잎은 동부(퀘벡, 몬트리올)에 많다. 작년 추수감사절 연휴에 몬트리올과 퀘벡에서 봤던 끝 없는 단평선(단풍 지평선)을 다시 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동부의 도시이며 캐나다의 수도에 다녀왔다.
오타와에서의 마지막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비행기 시간까지 애매한 시간이 남아서 공공도서관을 찾아갔다. 평범한듯 아늑하고 어딘지 익숙한 도서관의 한 켠에 캐리어를 편안하게 보관하고 읽을만한 책을 고르러 서가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소설을 고르러 800번 분류가 붙은 책장을 찾아가지만 이번엔 낯선 곳을 눈길 닿는대로 걸었다. 그러다 예술 책장에 다다랐다. 오타와 여행 중 캐나다 국립 미술관에서 4시간여 시간을 보내며 그림을 감상하고, 특히 캐나다에서 사랑받는 7명의 작가의 그림 중 Tom thomson의 가을 풍경이 마음에 남았기에 그의 작품집이 있을까 싶어 책을 뒤적였다. 그러다보니 그림 작법 책까지 손이 닿았고, 어반스케치 책 중 생생한 사람들의 모습이 매력적인 책을 한 권 뽑아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자유로운 그림체, 여행지에서의 도시와 자연의 풍경, 무엇보다 그 풍경 속에 살아있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15년 정도 느리게 바깥에서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림 실력이 좋지 않아 사람을 그릴 엄두를 낸 적이 없었다. 늘 앉은 자리에서 자연의 모습만 그렸다. 그런데 올 여름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어반스케치 모임을 나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함께 그림을 그려보니 서로의 시선이 모두 달라 신선했다. 해변에 모여 그림을 그리면 나는 산과 바다, 노을 지는 하늘과 바다빛, 갈매기를 그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대화하는 사람들, 버스킹 하는 사람,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웃음을 그려넣었다. 그 그림은 청량한 여름의 캐나다를 담뿍 담고 있었는데, 내가흉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뽑아든 이 책은 나도 사람이 지닌 생생함과 고독함,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손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어린이들이 쓰는, 하나의 색연필에서 여러색이 나오는 색연필로 그린 할머니 할아버지, 한가지 포인트 색상을 칠한 사람, 어딘가 삐뚤빼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그림들이었다. 그 책은 사람을 그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몸의 선이나 기울기, 구조 같은 것을 잘 관찰해보라고 했다. 정해진 것은 없으니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데로 그려보라고 했다. 책의 저자처럼 한 눈에도 매력이 통통 튀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겠지만 갑자기 이 사람의 그림들을 보고있으니 이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왜 갑자기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는. 다시 올 일 없는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 주는 영감을 지나치지 않고 싶어서였을까? 어반스케치 모임을 다니며 다른 사람의 그림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마음이 풍선처럼부풀어 오르다 이 일을 계기로 팡 터졌기 때문일까?
여행에서 돌아와서 나는 갑자기 유투브로 어반스케치- 사람 그리기, 인물 드로잉들을 검색해서 공부를 하고 하루 30분씩 1시간씩 시간을 내서 그림 그리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기우뚱한 낙서일 뿐이었는데 어떻게 그려야할지 끙끙거리며 사진을 보고 고민하다보니 점점 사람을 닮은 무언가가 종이 위에 남는 듯 하다. 지난 주말에는 집 근처에서 하는 작은 페스티벌에 다녀와 가을의 풍경을 그렸다. 가을 한가운데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발그스름한 즐거움을 담아보았다. 처음으로 그럴듯한 그림을 그렸다.
이제 나는 밖에서 그릴 때 자연의 풍경만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서는 매년 10월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가서 2박 3일을 보냈다. 낮부터 밤 10시까지 돗자리에 앉고 누워 음악을 듣고 먹고 마셨다.몽글몽글한 내 기분을 따라 뮤지션들의 모습, 음악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내 종이 위에 그려질 수 있다. 집 근처 공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노인과 아이, 강아지의 행복한 모습을 눈에 담았는데 이제 손으로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밖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 그 풍경이 오래 오래 마음에 담겼다. 이제 움직이는 사람들의 에너지도 오래 오래 마음에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그리는 것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걸음이 느려져도 즐길 수 있는 취미이기에 지금부터 쌓아 놓으면 나중엔 퍽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갈색 베레모를 쓰고 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좋아하는 만년필과 붓을 들고서.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음에 마음 깊이 감사하면서.
동경만 하던 생동감 넘치는 그림. 그런 그림을 그릴 첫 시작을 오타와의 공공도서관에서 만난 책이 열어주었다. 우연히 만난 책이 내 일상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순간을 제대로 알아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