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가늘고 긴 취미가 있다. 15년 동안 1년에 네 다섯번 정도 밖에서 앉아 그림을 그려왔다. 여행지에서나 일상에서 직접 본 풍경을 그리는 것을 '어반스케치'라고 하는데 날 좋은 날 벤치나 피크닉 매트에 앉아 스케치를 하면 그 순간의 공기와 소리, 색감이 온전히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한 감각을 좋아했다. 20대 초반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베네치아에서의 고요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 앉아 가지고 있던 아무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렸던 순간이나 스위스의 유람선에서 백조가 유영하는 모습을 그리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않고 일행들과 헤어졌던 날의 충족감은 10년이 지났는데도 특별하게 기억이 난다. 다만 어반스케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바깥 독서라, 밖에서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과 책을 읽고 싶은 마음 중에는 대부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좀 더 앞서 몇 달에 한 번씩만 그림을 그렸다. 자주 그리지 않으니 그림 실력은 더디게 늘었지만 그리고 있는 순간 자체가 중요한 터라 결과가 맘에 들지 않아도 오래 지속해 왔다.
1년 전 캐나다 밴쿠버로 이사 오면서 대대적으로 짐을 꾸릴 때 많은 것을 처분했어도 수채화 종이와 물붓, 작은 파레트, 오일파스텔은 배에 실었고 1년 동안 4개의 집을 옮겨 다니다 12평 작은 집에 정착하며 가진 물건을 대폭 줄이며 오일파스텔과 붓들은 처분했어도, 최소한의 도구는 고이 가지고 있었다. 밴쿠버에서의 1년 동안에는 과거의 내 삶과 달리 밖에서 하이킹 하고 자전거 타고 수영을 하느라 그림을 그린 적은 없지만 너무 오랜 취미라 놓을 수가 없었다. 미니멀리즘의 길로 걷고 있는 중에도, 1년이나 쓰지 않은 물건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 Meet up이라는 모임 어플에서 밴쿠버 어반 스케치 그룹을 발견했고, 다음날 오전에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내가 밴쿠버에 와서 처음으로 일몰을 보며 감탄했던 로즈 가든에서 스케치 모임이 열리는 것을 보고 바로 참가 신청을 했다. 지난 15년 동안 종종 어반 스케치를 하는 사람들의 글과 영상을 보기도 하고, 고궁이나 공원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한번쯤 그런 모임에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시작이 해외에서일 줄은 몰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랍 한켠에 있던 종이와 연필, 물붓과 팔레트를 챙겼다. 스케치북이 아니라 낱개로 들어있는 수채화 종이를 쓰는데 종이를 고정하는 클립 보드가 없어서 옷을 담아 두었던 신발 상자를 잘라 종이 뒤에 대어 고정하는 보드를 만들었다. 좁은 집에 살면서 물건을 사는데 더 고심하게 되었기에 밖에서 계속 그림을 그릴지 알 수 없어 일단 재활용을 했다.
일요일 오전, 파란 하늘에 적당한 구름, 선선한 날씨에 기분이 좋았다. 만남 장소에 나가보니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린 학생도, 중년도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밴쿠버답게 아시아인도, 백인도, 남미나 중동 사람들도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여러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이 모임에 처음 왔다고 내가 인사를 하자 다들 조용히 반겨주었고, 2시간 동안 각자 그림을 그린 후 다시 이 자리에 모이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림을 그리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안히 얘기하라고 다들 환대해 줄 것이라 했다.
나름 외향적인 나는 어떤 새로운 모임에 나왔을 때 이렇게 서로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다들 흩어져 로즈 가든을 걸으며 그리고 싶은 풍경을 골랐다. 어떤 사람은 장미 넝쿨 바로 앞에 앉았고, 어떤 사람들은 계단 위 높은 곳에 앉아 넓은 전망을 가늠해 보았다. 나는 그들을 구경하다가 평소에 자주 산책 나와 바라보던, 내가 감탄해 온 전망을 손으로 옮기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그림을 그리는데 2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져 정성 들여 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들면 진지한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걸리니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집중해서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볼펜으로 선을 땄다. 바람에 장미 향이 실려왔다. 진한 장미 향을 맡으며 빨갛고 노란 장미꽃에 색을 입히고 있으니 호사스러운 순간을 붙잡고 있는 듯 했다.
그 때 이 모임에 처음 나왔다는 한 사람이 내게 자신은 아주 빨리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딱히 다른 도구가 없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반 스케치용 팔레트를 보여주고 간단히 수채화 채색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자 그 사람은 자신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변환해주는 어플을 사용한다며, 5분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사진을 찍어 몇번의 클릭으로 그림을 만들고는 내게 보여주며, 이렇게 빨리 그림을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림을 그리는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이런 사람이 어반 스케치 모임에 왜 굳이 나온 것일까 궁금했지만, 저 사람도 진짜 왜 그리는지 궁금해서 나온것인가 싶어서 대답해 주었다. 내게는 결과물이 중요하지가 않다고. 밖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나무 한 그루, 꽃 한송이를 하나 하나 그리고 있을 때 다른 생각은 다 사라지고 오직 풍경과 내 손의 감각만 남는 몰입을 경험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 사람은 신기해 하며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사람의 옆에 가 앉아 같은 질문을 했다. 챙이 넓은 멋진 가죽 모자를 쓰고, 여러 그림 도구들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할아버지였는데 그는 사람들은 여행지를 추억하기 위해 기념품을 산다며, 자신에게는 그 어떤 기념품보다 그 곳에서 직접 그린 그림이 오래 기억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주고, 오래 활동하고 있는 어반 스케쳐의 생각을 들려 주었다. 그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오래 그려왔을 할아버지의 그림과 도구들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다시금 내 그림에 색을 입히는데 집중하고 있을 때 로즈 가든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걷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림에 감탄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한 아주머니는 딸 둘과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그리고 있는 이 모임에 대해 물어보며 멋진 시간이라고 했다. 귀여운 애들이 내 그림이 너무 멋지다며 눈을 빛냈다. 나도 언제나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조용히 그들의 그림을 구경하고 감탄했는데, 보잘 것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도 그런 반응을 듣다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어디에나 있나보다.
하늘과 바다, 나무와 꽃에 색을 입히고 고개를 들자 대부분 그림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다. 내 그림을 들고 그림을 완성한 사람들에게 나는 어반 스케치 모임은 처음이라 간단한 도구만 가지고 있다고, 어떤 물건들을 쓰냐고 물었다. 말 없던 사람들은 가지고 다니기 좋은 스케치북, 물에 번지지 않는 잉크를 채운 만년필, 팔레트를 고정할 수 있는 자석 같은 것을 보여주며 내 도구에 대해서도 조언해 주었다. 테이핑을 하거나 클립 보드를 쓰면 편안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알려주는 조용히 단정한 눈빛들이 인상 깊었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한 켠에 자신의 그림을 놓았다. 열 몇개의 그림들이 나란히 놓이고 사람들은 꼼꼼히 그림을 구경했다. 그렇게 말이 없던 사람들이 서로의 그림을 보여 감탄하고, 전에 그린 그림들까지 넘겨보며 이 그림은 누구의 그림이냐고 물었다.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너의 그림은 어떤 것이냐 묻고 마음에 든다고 말해 주었다. 나무를 채색한 후 두꺼운 펜으로 마무리 한 방식이 좋다고 다음에 따라해야겠다고 하거나, 따뜻한 색감이 마음에 든다거나, 정원에 그려진 작은 사람이 귀엽다거나 하는 문장들이 다정했다. 나는 내 그림이 부끄러웠는데, 모두가 너의 그림이 좋다고 해주니 그 곳에 그림을 두고있을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서로의 그림을 보아주고, 서로의 이름을 알고나서 함께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국분이라는 한 아주머니와 방향이 같았다. 그 분은 오래 그린 사람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는데, 전공을 하신것이냐 묻자 고등학생 때까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런데 자식들 교육을 위해 밴쿠버에 와서 대학을 보내고 취직을 시키고 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져 수십년 전 놓았던 그림이 생각나서 이 모임에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하셨다. 앞으로 자주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하셨다.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걷는데 물을 묻힌 종이에 물감이 번지듯 온화한 행복감이 내 안에 퍼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밴쿠버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도, 아이를 위해 이민을 온 중년들도, 은퇴를 한 후의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도 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신의 방식으로 흰 종이에 담는다. 앞으로도 종종 그들과 함께 밴쿠버의 아름다움을 종이에 남기고 싶어졌다. 꽤 오래 종이 한장 한장으로 기억에 남을 순간을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