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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Dec 21. 2023

캐나다 로키의 겨울

겨울 동화 마을, 캐나다 밴프에서의 4박 5일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세계 여행지 상위권에는 항상 캐나다 로키 산맥의 국립공원이 꼽힌다. 그림 같은 산의 절경와 에메랄드빛 호수. 돌아다니면서 마주치는 엘크, 곰, 산양 등 야생동물들. 특별하게 아름다운 대자연을 볼 수 있으면서도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관광 시설들까지. 캐나다에서 1년 반 지내는 동안 캐나다의 이곳 저곳과 미국 로드트립을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곳은 로키의 밴프 국립공원이다. 이 곳은 여름이 가장 인기가 많지만, 나는 로키의 겨울에서 선명한 행복을 느꼈다.


  처음으로 즉흥 여행 중인 둘째 날 우리는 비지터 센터에 갔다. 여름엔 줄이 꽤 길었는데 겨울엔 사람이 없어 안내해주시는 분들끼리 수다를 떨고 계셨다. 우리는 여름에 2번 밴프에 왔고 겨울은 처음이라고, 겨울에는 어디에 가면 좋은지를 물어봤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안내해주시는 분이 눈을 반짝이며 커다란 관광 지도를 꺼내놓고 이곳 저곳에 표시를 하며 추천을 해주셨다. 에메랄드 빛의 특별한 호수는 이미 얼어서 눈이 덮였기에 겨울의 밴프는 여름과는 다른 곳들이 아름다운 듯 했다. 눈이 많이 오는 로키에서 도로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도 알려주고, 레이크 루이스나 설퍼산 등 유명 관광지의 실시간 동영상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쉽게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다니! 내가 미리 알아보는 것보다 밴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이 곳에 오는게 더 낫다는 걸 알았다.


  추천해주신대로 보우 폭포에 가는 길 높은 곳에서 보이는 설경도 보고, 여름과 달리 얼어 붙은 낮은 폭포도 봤다. 꽤 유명한 곳인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겨울만의 매력에는 고요함이 더해진다. 바나나를 간식으로 먹고는 미네완카 호수로 향했다. 미네완카 호수로 가는 드라이브 길이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가는 길 투잭 호수도 거쳐 가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산 길, 양 옆에는 눈 덮인 산이 조각같이 펼쳐져 있었다. 감탄하며 가는데 도로 한가운데에 차가 멈춰서 있었다. 뭐지? 뭐가 지나가나? 하며 우리도 차를 멈춰 오른쪽을 보니 아직 얼지 않은 강의 빛깔이 청아했다. 그리고 펼쳐진, 나무 사이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다섯마리의 엘크가 유유히 걸으며 풀을 먹고 있는 모습.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으니까. 눈 덮인 산과 침엽수들, 눈 쌓인 풀 위를 걷는 엘크들. 그 아래로 흐르는 청아한 물과, 빗방울이 떨어져 그리는 동심원까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는 조용히 감탄했다. 얼마나 그 곳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사람이 없어 다가오는 차가 없었기에 오래 바라볼 뿐이었다. 이 장면을 본 것으로 이미 이번 여행은 완성되었다.


  다시 이동하면서 우리는 행복감에 젖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금방 작은 공터가 나왔다. 차들이 꽤 있길래 여긴 뭘까 하고 내렸는데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들고 내려가고 있었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또 한번 탄성이 나왔다. 포근한 날인데도 호수는 얼어있었고 사람들은 너무 즐겁다는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거대하게 조각 된 산. 함께 여행 온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 여섯 분은 호숫가에 앉아 스케이트를 신고 계셨다. 나랑 남편은 초등학생 때나 스케이트를 타봐서 지금 타면 넘어져서 다칠 것 같다, 걷지도 못할 것 같다며 부러움 섞인 소소한 걱정을 나누고 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어서서 나아가기 시작하셨다. 그 분들은 스케이트를 정말, 못타셨다. 초보인데 빌린 스케이트를 들고 이 곳에 와서 저렇게 아이 같이 신나는 표정을 짓고 계신 거였다.

  아- 너무 보기 좋다.

이 곳에 살면서 늘 많은 노인들을 본다. 캠핑장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노인들, 등산 장비를 잘 갖추고 산을 오르고 있는 노인들, 우리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개와 함께 달리고 있는 노인들, 식당에서 와인을 함께 나누고 있는 노인들. 오늘 만난 꽁꽁 언 호수 위로 스케이트를 신고 뒤뚱 뒤뚱 느리게 움직이는 노인들. 그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 속에 가만히 퍼지는 온기를 느낀다.   

 

 호수의 깊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씽씽 달리며 하키를 하고 있었다. 이 것이 바로 캐나다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럽게 따뜻해진 날씨에 다른 편에서는 물이 녹아 산 그림자가 물에 일렁이고 있었다. 이름도 몰랐던, 관심도 없었던 투 잭 호수는 그렇게 내게 너무도 인상 깊은 풍경으로 각인되었다.


  투 잭 호수를 뒤로 한 채 미네완카 호수로 향했다. 그 곳은 눈이 잔뜩 쌓였다가 녹은 것이 꽁꽁 언 듯 도로가 빙판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데 길이 비스듬해서 미끄러졌다. 자동차문을 붙잡은 채 대롱 대롱 매달려 다시 차에 올라서 다른 곳에 차를 댔다. 이런 곳은 또 처음이었다. 차에서 내려 호숫가 까지 가는데 모든 집중력을 다 써야했다. 힘겹게 호숫가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또 다시 기어가는 속도로 차에 돌아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방을 놓고 나와서 다시 그 빙판길을 위태롭게 걸어 다녀와야 했다. 원래는 미네완카 호수를 무척이나 기대하면서 이 곳에 온 것이었는데 빙판길에서 차도 사람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애쓰던 것만 기억이 난다. 푸하하 웃으며 조심 조심 느리게 돌아가는 길, 다시 투잭 호수에 멈춰서 계란과 바나나를 먹으며 다시 없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지터 센터에서 추천해준, 뷰 포인트에 갔다. 겨울의 꽃이라는 스키장 근처까지 차로 올라가면 펼쳐지는 곳이었는데, 사슴 두마리가 유유히 풀을 뜯으며 걸어가고 있어서 그 만큼 특별했다. 하얀 설경 속 동물의 모습. 겨울 로키는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캐스캐이드 마운틴과 사슴

 

  다운타운으로 돌아와 핫초코 트레일 마크가 붙어 있는 통나무집 식당으로 들어갔다. 겨울의 밴프에서는 카페와 레스토랑,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핫초코 트레일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핫초코를 판다. 귀여운 일이다. 추운 밖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서 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는 달콤 쌉쌀한 핫초코를 마시면 마음이 꽁꽁 언 것들이 사르르 녹는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외관과는 달리 멕시코 타코를 파는 곳이었고, 마침 50% 할인을 하고 있어서 더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밴프는 다운타운이 아니면 식당이나 가게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여행하는 중에는 챙겨간 간식이 아니면 음식 먹기가 힘들다. 배고팠다가 먹는 타코, 디저트로 먹은 핫초코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식사였다.



여행지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쁠지 미리 알 수 없다. 계획은 할 수 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고, 예상치 못했던 순간들이 마음 속에 남아 오래 오래 기억된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더 구체적으로 그것을 깨닫는다. 언제나 미리, 많은 것을 알아보고 계획하던 나는 이번 즉흥 여행이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고 특별해서 너무도 즐거운 중이다.

흘러가는대로, 찰나의 소중한 순간들에 잘 머무르면서 여행하는 것. 이 여행으로 살아가는 법도 깨달았다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나의 삶이 조금쯤 느슨해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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