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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Dec 15. 2023

J가 떠난 P의 여행

겨울 동화 마을, 캐나다 밴프에서의 4박 5일

  P들은 어떻게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는걸까? 내 남편은 왜 아무 생각이 없을까? 3주나 내가 있는 캐나다로 여행 오는 엄마랑 동생들은 왜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라고 아무리 말해도 검색해보지 않고,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주는데도 계속 미루는걸까? 왜 내 친구들 중 몇몇은 같이 여행 갈 때 뭐든 다 좋다고 하는걸까?


  가족과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MBTI가 ESFJ인, 계획형 J인 나는 즉흥 인간 P인 남편, 엄마, 동생 둘과 부대껴 살며 늘 그들이 왜 그런건지 궁금했다. 없는 시간 쪼개어 여행을 가는거라면 편하고 좋은 시간에, 적당한 비용만 들이는게 좋지 않나. 가보고 싶던 곳으로 가는거라면 그곳의 좋은 곳을 잘 누리는 것이 좋지 않나? 찾아갔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 중이라거나, 교통이 두시간에 한번씩만 있다거나,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 몰랐다거나 하는 상황들은 인터넷이 과하게 발달하고 정보 전달을 잘 해주는 블로거나 유투버가 많은 요즘엔 얼마든지 미리 편안하게 피할 수 있는 상황 아닌가.


  한달 짜리 미국 로드트립을 떠날 때 한달치 숙소(캠핑장, 에어비앤비, 호텔)를 모두 리뷰와 위치와 가격대를 꼼꼼히 비교해서 예약해놓고 출발한 나는, 꼭 하고 싶은 즐길거리는 모두 미리 예약해놓고 출발한 나는 처음으로 즉흥 여행을 떠났다. 북미의 겨울 방학은 보통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2주이다. 그 기간은 극성수기라 비행기표든 숙소든 너무 비싸서 겨울엔 여행 하기가 힘든데 그 전에 시간이 갑자기 나서 어디든 가고 싶어졌다. 항공권의 목적지를 '어디든지'로 해두고 이리 저리 보다보니 남편이 겨울 밴프가 어떻겠냐고 했다. 보통 여름에 가서 에메랄드빛 호수와 산맥에 감탄하는 로키 산맥에 우리는 벌써 두 번을 갔다. 우리끼리 한번, 친정 식구들이 와서 한 번. 그런데 겨울 밴프는 다른 세상이었다. 작년에 김연아가 밴프 국립공원에 있는 레이크 루이스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우아한 모습이 떠올랐다. 눈 덮인 설산, 하얗게 얼어붙은 호수, 그림 같은 산이 배경처럼 걸려있는 다운타운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져 있는 모습. 그래 이 곳이다! 벌써 두 번을 갔던 곳이라 준비 부담이 적었고, 여름에 비해 겨울은 항공권도 3분의 1, 숙소도 3분의 1 가격이기에 당장 예약했다.

김연아 인스타그램 캡쳐


  비행기 타는데 일주일 후 출발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여행이라면 응당 한달 전에는 예약하고 준비해야 하는 줄만 알았는데 가슴이 콩닥 콩닥 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즉흥 여행이 해보고 싶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봤다. 가까운 즉흥 인간들을 이해해 볼 기회가 왔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는 중에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spirit of christmas라는, 밴프 다운타운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조명 행사를 보여주는 바람에 그거는 빈 자리 있는 시간에 하나 예약했다. 즉흥 인간들은 이런 것도 미리 예약하지 않는 것 같지만.... 꼭 보고 싶길래 했다.


  여행 떠나는 전 날 한 시간 안에 가볍게 짐을 챙기고 출발! 비행기 타고 캘거리 공항에 도착해 렌트카를 렌트하고 (당연히 스노우타이어일 줄 알았는데 4계절용 타이어였다. 몰랐다.) 1시간 반 거리의 밴프로 향했다. 가는 길 주변이 캄캄해졌다. 1시간의 시차와 4시라는 이른 일몰 시간을 미리 생각하지 않아서 가는 길에 깜깜해질 줄 몰랐다. 가다보니 고속도로 요금소 같은게 있었고, 이미 밴프 국립공원이라면서 국립공원 패스를 사야 한다고 했다. 작년엔 1년권을 샀어서 역시 몰랐다. 안내원이 안내해 주는대로 4박 짜리 티켓을 사고 차 창문에 붙였다. 그렇게 좀 더 달려 밴프 사인을 지나쳐 들어가니 온통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은 크리스마스 나무 모자를 쓰고 있고, 통나무 오두막처럼 생긴 호텔들은 반짝 반짝 전구를 두르고 있었다. 그 때 마침 Nat King Cole의 Unforgettable이 흘러나왔다. 따뜻하고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산타 마을로 들어가는 동화 같은 분위기였다.

  

  초롱 초롱한 기분으로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아늑한 독채 통나무집과 키 큰 침엽수가 어우러진, 캐나다스러운 곳이었다. 체크인을 하자 밴프의 대중교통인 롬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는 티켓을 줬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내내 쓸 수 있는 티켓이라 좋았다. 벽난로와 주방, 커다란 통창이 있는 방에 짐을 내려놓고 버스를 타러 나갔다. 마침 숙소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었다. 밴쿠버 도시에 살다가 통나무로 된 집이 많은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여행 온 실감이 났다. 마침 버스가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다운타운 거리에 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또 마침 크리스마스 관련 물건들만 잔뜩 모아놓은 크리스마스 가게 바로 앞이었다. 들뜨는 기분으로 가게에 들어가 캐롤을 들으며 한참 연말 분위기를 느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구경하다보니 7시에 영업 시간 종료라 가게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지난 여름 가족들이랑 찾아갔는데 줄이 너무 길어 1시간을 기다리다 포기했던 라멘집에 다시 가봤다. 겨울이라 사람이 적어서 조금만 기다리다가 들어가서 맛있는 라멘에 삿포로 생맥주, 타코야키를 먹었다. 추운 날 밖에 있다가 뜨끈한 국물을 먹는 행복. 그리고 생맥 한모금이 주는 청량함.


 뜨겁고 짠 음식이 추운 몸을 덥혀주었고, 만족스럽게 채워진 속을 느끼며 밖에 나왔다. 왜인지 거리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 조금 걸어보니 7~8시에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은 거였다. 우리는 문을 닫고 정리와 청소를 하는 가게들의 바깥을 걸으며 크리스마스로 꾸며진 모습을 구경하다가 시간이 남아 안쪽 골목에 들어갔다. 지난 방문 때는 항상 바빠서 다운타운 중심가만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안쪽 골목은 유난히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길거리에는 모닥불이 피워져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쬐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폭닥폭닥한 플란넬 가게, 가장 오래된 통나무집의 찻집, 눈송이의 모습으로 하얗게 반짝이는 조명. 다음엔 낮에 오자며 걷다보니 스키 장비 같은 것들을 빌려주는 가게가 나왔다. 아직 영업 중이라 들어가보니 아이젠이나 등산스틱, 스케이트들도 대여할 수 있었다. 하루 렌탈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보고, 문 여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왔다.


  여기서 장비를 빌려 설산 하이킹을 할 생각에 기뻐하며 밤 늦게까지 하는 큰 마트에 가서 아침과 간식 거리들을 사들고 나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야외 핫 텁이 있었는데, 밤이라 모락 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더 잘 보였다. 내일 아침에는 추운 겨울의 야외 온천을 해볼까 생각하며 방에 들어가 부츠와 털모자, 장갑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누워 생각했다. 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즉흥 여행도 좋구나.


 원래였으면 미리 시차와 일몰 시간을 확인하고 비행기표를 끊었을텐데, 가장 저렴한 표를 산 덕분에 비용도 아끼고, 까만 마을이 따뜻하게 반짝이는 곳에 그림처럼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들어설 수 있었다. 우연이 만들어준 순간이었다. 가게의 영업 시간들을 몰랐기에 구경할 상점이 없어서 바깥 거리를 걸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냥 걸어다녀도 크리스마스 가게도 구경할 수 있었고, 다음에 눈 덮인 산을 등산할 장비를 빌릴 곳도 발견했다. 아무 계획이 없고 아무 정보가 없었어도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버스 티켓을 쓰게 되었고, 맛있는 것을 먹었다. 무엇보다, 아쉽거나 불안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지난 여름, 레이크루이스 셔틀 버스를 예매해놓고, 예상치 못한 도로 공사로 차가 막혀서 셔틀 시간을 못맞출까봐 얼마나 불안했던지. 가족들에게 제일 아름다운 한낮의 호수를 보여주고 싶어서 거기까지 가는 몇 시간 동안  조급해하느라 가족들을 불편하게 했다. 아무 것도 하고자 하는게 없으니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치는 것들에 감탄할 수 있었다. 늦게 도착해 가게들이 문을 닫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런게 즉흥 여행의 매력인가보다 생각하면서, 다음 날을 기대하면서 잠이 들었다. 내일은 무엇을 보게 되고 무엇에 즐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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