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친구가 캐나다 포트코브(Porteau Cove) 캠핑장에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11월의 밴쿠버는 낮엔 8도, 밤엔 영하 1도 정도의 초겨울 날씨이다. 겨울 캠핑 장비가 없는데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는 1박은 안하고 놀다만 왔다. 불멍하고 친구가 끓여준 순대국 먹고 군고구마랑 마시멜로우를 먹으며 이것이 겨울 캠핑의 맛이구나! 하고 느끼고 밤 9시쯤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두 시간 넘게 몸이 데워지지를 않아서 우리는 겨울에는 캠핑 못하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캠핑 없는 겨울을 보내고 올 해 5월 미국 로드트립을 갔다. 한여름의 사막인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도, 눈이 오고 비도 온 영하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도 차박 캠핑을 했다. 특히 눈비 오던 옐로우스톤이 무척 추웠다. 그렇지만 히트텍, 자켓, 경량조끼, 경량패딩, 바프(얼굴을 덮는 천), 비니까지 몸에 걸치고 끓인 물을 넣은 보온 물주머니를 두 개나 안고 잘 잤다.
그 로드트립은 나에게 성취 경험으로 남았다. 캠핑 예약해둔 날 폭우가 쏟아진다고 할 때도, 올라야 하는 산이 생각보다 높을 때도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곰 나오고 눈도 오는 캠핑장에서도 잘 잤는데 뭐! 이런것 쯤이야!" 건강 염려증에 추위를 미친듯이 싫어해 겨울에는 거의 집에만 있었던 나는, 몸이 힘든걸 무척 싫어하는 나는, 차에서 잔 날은 열흘도 안되는데도 마치 한달 내내 차박 캠핑한 사람처럼 무모해졌다. 작은 성취는 자신감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지난 주 밴쿠버의 하늘이 깨끗하게 맑았다. 여기는 11월부터 4월까지는 4시부터 밤이고 내내 비가 오는데 이렇게 화창하게 맑은 날은 선물 같다. 나들이 정도로는 아까운 날씨라서 캠핑장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바다 바로 앞이라 인기가 너무 많아서 예약이 거의 불가능한 포트코브 캠핑장 바닷가 바로 앞에 한자리가 남아 있었다. 이것 저것 생각할 새 없이 자리를 예약하고 결제를 했다. 우리는 한시적으로 밴쿠버에 사는 미니멀 캠퍼라서 겨울용 텐트 같은건 없다. 로드트립 때도 구멍 숭숭 뚫린 텐트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힌 차에서 잤다. 그렇지만 뭐, '우리는 곰 나오고 눈도 오는 캠핑장에서도 잘 잤는데 뭐!'
이렇게 생긴 텐트 위에 천 하나를 올리는 우리 텐트
무모한 사람이 된 덕에 누리게 된 겨울의 1박 2일 캠핑은 그 자체로 오롯이 행복했다. 바다 바로 앞에 텐트를 치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갓 내린 커피의 따끈하고 향긋한 맛을 느끼며 캠핑 의자에 앉아 이따금씩 물개가 헤엄치는 바다와 눈이 조금 덮인 산을 바라보는 순간엔 어떤 걱정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호사스러운 풍경 앞에서는 그저 행복해하며 누릴 뿐이다. 그런 풍경 앞에서는 메이플 쿠키도 유난히 달고 맛있다. 깨끗하게 맑은 하늘에 해가 점점 내려오며 바다에 윤슬을 뿌렸다. 남편은 그 풍경 속에서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그림에 담았다. 원랜 바다와 산만 그릴 수 있었는데 요즘 인물 드로잉을 연습한 덕에 이제는 이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남편의 모습도 그려넣을 수 있다.
겨울에는 4시부터 해가 져서 금새 어둡고 추워서 장작을 3번들이나 샀다. 평소 1번들에 2시간 정도 타니까 2번들을 산다. 이번엔 넉넉히 사서 4시부터 불을 피웠다. 모닥불을 잘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나는 불 마스터가 되고 싶어서 늘 불을 전담해왔다. 네모 모양으로 장작을 놓고 종이컵에 손소독제와 휴지를 번갈아 넣어 불을 붙여 장작 사이에 두면 착화제보다 오래 타서 나무에 불이 잘 붙는다. 불이 잘 안 커지는 것 같으면 종이 부채로 빠르게 부채질을 하면 금새 불이 커진다. 타닥타닥 소리와 불티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 장작을 넣을 때를 가늠한다. 모닥불을 이렇게 잘 다루니까, 나는 이제 초보 캠퍼는 아니다. 하하.
호일에 싸온 고구마를 장작 위에 올리고 여명마저 사라지는 하늘빛을 헤아리며 불멍을 한다. 한낮에 울던 바다사자들은 해가 져도 운다. 바다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하는 캠핑이라니, 이거 정말 대자연 캠핑 아닌가!
밤이 되니 공기가 무척 찼지만 모닥불 앞은 따뜻하다. 별이 하나씩 떠오르는 것을 이따금씩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바라보니 우리 자리의 양 옆은 캠핑카이고 다들 안에 들어가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겨울은 겨울인가보다. 그렇지만 뭐! 캠핑카 없어도 이정도 추위는 문제 없으니까! 챙겨온 바프를 목에 걸고 눈 아래까지 올려 시린 얼굴을 감싸고 마저 불멍, 별멍, 하늘멍, 바다멍을 한다. 쳇 베이커나 에릭 클립튼의 음악은 추운 날의 불멍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고구마를 꺼내보니 오래 구워서 조금 탔지만 꿀처럼 달았고, 가져온 만두전골을 끓여서 후후 불어 먹었다. 추운 날 밖에서 먹는 따끈한 전골. 집에서 먹는 것보다 몇 배는 맛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남은 장작을 태웠다. 평소라면 1번들이 두시간은 타는데 추워서 장작을 빠르게 넣다보니 3번들은 4시간 좀 넘게 탔다. 밤이 이르게 와서 낭만적인 밤의 무드를 일찍부터 오래 누렸다. 자리를 정리하고 밤 9시에 텐트로 들어왔다. 결로 방지용으로 모기장처럼 생긴 텐트 위에 천 하나를 올리는 구조로 되어있는 우리의 3계절용 텐트는 밖과 다름없는 온도였다. 그렇지만 전기 되는 사이트라서 전기장판도 가져왔고 침낭 위에 덮으려고 이불도 더 가져와서 자리에 누우니 있을만 했다. 전기장판이 막 따뜻하진 않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줬다. 공기는 영하의 온도였지만 비니와 바프를 쓰니 괜찮았다. 하루 종일 내내 행복하기만 했으니,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면 이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잤다
그 때 마침 한국에서 동생이 첫 캠핑을 갔다고 했다. 내 동생을 캠퍼로 만들기 위해 여름에 밴쿠버에서 1박 2일 캠핑을 경험하게 해줬는데 드디어 첫 캠핑을 가다니, 그런데 이 겨울에? 너무 추울텐데 대비를 안했을 것 같아 물어보니 어떤 사설 캠핑장에서 겨울 텐트는 2만 5천원에 대여할 수 있고, 만 원을 추가하면 텐트 치고 자리 셋팅도 다 해준다고 했다. 전기 난로도 대여했다고 했다. 동생이 보내준 사진은 정말 너무 따뜻해 보였다. 캐나다에서 첫 캠핑을 하고 캠퍼가 된 우리에게 한국의 서비스는 정말이지 호텔 수준으로 느껴진다. 아무 장비가 없는데, 그렇게 비싸지 않은 돈으로 겨울 캠핑을 할 수 있다니!
동생이 보내준 아늑한 텐트 사진
우리는 겨울 텐트도, 전기 난로도, 노동을 대신해 줄 사람도 없지만 꽁꽁 싸매고 누워 있는 우리의 용기가 좋아 낄낄거리며, 늦은 밤까지 아우성치는 바다사자의 소리에 웃음을 참으며 누워서 놀았다. 밤 12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달빛이 너무 밝아서 우리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조명 하나 없는 자연 속에서 보니 휘영청 밝은 달이라는게 뭔지 정확히 알겠다. 달빛이 좋아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 바다를 좀 걸었다. 그리곤 다시 텐트에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다. 코가 시리고 좀 뒤척였지만 나름 8시간을 잘 자고 일어났다.
아침에 혼자 밖으로 나와 음악을 틀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푸른 빛이 감도는 아침 색. 어제 낮엔 노란 빛이었고, 밤 12시엔 쪽빛이었는데, 같은 장소의 아침은 푸른 필터를 씌운 듯 했다. 물개와 오리가 헤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데 조금 눈물이 났다. 이 고요가 너무 좋아서.
30분 남짓 홀로인 시간을 즐기다 보니 남편이 나왔다. 그에게 커피와 메이플 쿠키를 줬다. 이게 무슨 호사냐 다시금 감탄하며 바다를 바라보다가 콩나물과 황태를 넣고 라면을 끓였다. 30분 후면 짐정리를 해야하지만 겨울 아침 야외 라면은 포기할 수 없다. 매콤하고 뜨끈한 라면을 먹으니 몸도 데워지고 힘이 나서 부지런히 자리를 정리했다. 우리의 속도로 1시간이 걸려서 11시 체크아웃 시간에 딱 맞춰 캠핑장을 나서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곰도 나오고 눈도 오는 캠핑장에서 차박도 해낸 우리는, 영하의 날씨에 구멍 숭숭 뚫린 텐트로 겨울 캠핑도 해냈다. 건강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작은 성취에는 또 다른 작은 성취가 더해졌다. 아마 또 다른 즐거움을 만들어낼 선택을 할 때 생각하겠지? '여름 텐트로도 겨울 캠핑 했는데 뭐! 이런것 쯤이야.' 작은 성취 경험은 무모하고 신나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러면 이번에 누린 1박 2일의 순수한 즐거움과 비슷한 어떤 것을 또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꾸만 새롭게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