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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Dec 30. 2023

눈꽃 하이킹, 꿈 속으로 들어가는 쉬운 방법

겨울 동화 마을, 캐나다 밴프에서의 4박 5일

  비현실 속으로 들어가 아주 아주 행복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반짝이는 색색의 전구가 빼곡히 둘러진 밤의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 하루에 가끔 동화 같은 순간을 새기는 것이다. 나는 캐나다에 와서 올해 초 처음으로 설산 하이킹을 하고는 이것이야말로 꿈 속 세상이라고 느꼈다.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인지 주변은 훨씬 더 고요하다. 소리가 거의 없는 곳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집중해서 산을 오르면 눈 밟는 소리만이 들린다. 하얀 나무 숲 사이를 오르는 동안엔 세상과 단절되는 기분이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몸은 더워진다. 뺨은 시리다. 그런 감각들 덕분에 현실을 더 잊을 수 있다.


  밴프 여행을 와서는 꼭 설산 하이킹을 하고 싶었다. 어제 레이크루이스와 존스턴캐년 협곡을 가던 길에 폭설로 포기를 하고 돌아왔지만 집에 돌아가는 날까지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전날 내내 내린 눈으로 멀리 보이는 산의 나무들까지 모두 하얗게 채워졌다. 숙소 바깥의 풍경만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산 속을 걷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 밴프는 강원도처럼 눈이 많이 와서 제설 작업을 열심히 잘 한다. 우리는 오전 중 제설 작업이 진행될테니 이른 아침에 출발했던 어제랑 달리 점심 즈음 출발하기로 했다. 만약 도로에서 포기하고 또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아이젠과 스틱을 반납하지 말고 숙소 바로 앞 터널 마운틴을 하이킹 하기로 했다. 존스턴 캐년의 얼음 폭포를 못 보게 되는건 아쉽지만, 잔뜩 눈 쌓인 산 속을 걷는 것은 그 곳이 어디든 너무 좋기 때문이다.


  전 날 갔던 아웃도어 용품점에 가서 아이젠과 등산 스틱을 다시 빌렸다. 한 낮의 겨울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가게 직원이나 집 주인들이 바로 앞의 눈을 치우고 있었고 도로는 이미 깨끗했다. 괜찮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먼저 레이크루이스로 향했다. 어제와 달리 보우밸리 파크웨이가 아니라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1시간 동안 이동하는면서 보이는 높고 수려한 산들이 어제와 달리 하얀 모습에 낯설고도 황홀했다. 제설도 거의 되어 있어서 낮에 출발하길 잘했다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레이크 루이스는 섬세한 붓질로 그려낸 것처럼 아름다운 산과 숲을 두른 채 끝 없이 새하얀 모습이었다. 꽁꽁 언 호수 위로 쌓인 눈을 밟으며 사람들은 천천히 걷거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대가족은 겨울왕국 올라프처럼 삼 단 짜리 눈사람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는데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호수에 크게 울려 퍼졌다. 눈사람을 만들어 본 게 언제더라? 아이의 웃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순수하게 즐거워졌다.


  레이크 루이스 위를 걸으며 김연아처럼 피겨 스케이팅 포즈도 취해보고 (사진 속 내 다리는 땅에서 찔끔 떨어져 있었지만), 페어몬트 호텔 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여름과 어떻게 다르지도 구경하다가 해 지기 전에 설산 하이킹을 해야하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언젠가는 이런 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며 매일 같은 풍경 속에서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레이크 루이스에서 존스턴 캐년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보우밸리 파크웨이를 이용했다. 일차선이라 나란히 늘어선 나무가 가까운 작은 길은 그 자체로 동화 같았다. 야생 동물을 위해 시속 제한이 무척 낮은 길을 느릿 느릿 구불 구불 달리는 동안 눈 덮인 키 큰 나무들을 그저 감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존스턴 캐년에는 겨울 밴프에서 사람이 제일 많았다. 겨울 여행지로서는 이 곳이 가장 인기인가보다. 주차장에서 부츠에 아이젠을 묶고 등산 스틱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이킹을 시작했다. 존스턴 캐년 협곡은 푸른 폭포로 유명한데, 로어 폭포까지는 입구부터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여름에 두 번 밴프에 와서 이 곳을 찾았지만 늘 로어 폭포까지만 올랐다. 작년 여름엔 체력이 안되서 그랬고, 올 해 여름엔 친정 식구들과 구경해야 할 것이 많아서 그랬다. 오늘은 1시간 좀 더 걸리는 어퍼 폭포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다. 해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조금 걷다보니 좁은 길에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에 가이드 투어 사람들이 설명을 듣는 줄 알고 옆으로 먼저 지나가겠다며 앞질러 갔다. 아니 그런데 왜 벌써 로어 폭포가 있는 것이지?? 두 번이나 온 곳인데 그 동안 우리의 체력이 많이 늘어서, 전혀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았기에 도착한 줄을 모르고 괜히 앞지르기를 한 것이었다. 30분이 마치 10분 같았다. 다행이도 아까 줄 서 있던 사람들은 투어 그룹이 맞았고, 그들은 폭포를 보기 전에 설명을 듣고 있기에 우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동굴을 지나 폭포를 보러 들어갔다. 동굴을 지나면 눈 앞에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나온다. 이번엔 하얗게 얼어붙은 폭포와, 깊숙이 조금씩 흐르고 있는 물을 가까이서 볼수 있었다. 겨울의 폭포를 보는 것도 인생 처음이다. 인생 처음인 이 일이 이렇게나 쉽다니, 운동하길 잘했다.


  로어 폭포를 보고 나와 어퍼 폭포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로어 폭포까지만 보고 돌아가기 때문에 그 위로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간간히 위에서 돌아오는 한 두명의 사람들만 마주치면서 진정 눈꽃 하이킹을 즐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어서 위를 바라보면 키 큰 나무들이 빼곡하고 오른쪽엔 얼어 붙은 폭포와 강이 얼음 아래의 흐름을 계속 한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짙게 푸른 물 빛을 바라보며 걷고 있으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캐나다에서 살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본래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다. 끊임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이 생각나고, 머릿속으로 많은 것을 확인하고 계획한다. 나의 이런 성향은 많은 것을 놓치지 않고 이루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지치게 했다. 온전한 휴식 같은게 뭔지 몰랐다. 그런데 눈 덮인 산 속을 걸으면, 일단 신체적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열이 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집중을 해야하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히 지금 여기에만 머문다. 여기에 더해 온통 새하얀 주변의 풍경, 눈이 소리를 머금어서인지 특별한 고요 덕분에 더 없이 행복해진다. 올해 초 처음으로 설산 하이킹을 하고 그 뒤로 몇번이나 산을 오르며, 내가 눈이 많은 곳에서 오롯이 현재에 머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밴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잡 생각도 없이 그저 감탄하며 걸었던 것 같다.

 

  삼 사십분을 더 걸으니 어퍼 폭포가 곧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설레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겨울에 암벽 타기처럼 얼어붙은 폭포를 기어오르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빙벽은 한 번도 본적이 없어서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도착한 어퍼 폭포의 모습은 정말이지 꿈 속 풍경 같았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은 오래 쏟아졌을 물들이 추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애니매이션 겨울 왕국에서 그려낸 눈 꽃 세상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성인이 되고 15년을 살았는데 본 적 없는 풍경들이 여전히 많다는게 즐거웠다. 감탄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운 좋게도 아무도 없어서 우리는 얼어붙은 폭포를 앞에 두고 보온병에 담아온 향긋한 차를 마시고 브라우니를 먹었다. 그냥 마트에서 산 브라우니인데 어찌나 맛있던지, 인생 최고의 브라우니였다. 한참을 폭포도 바라보고,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을 따라 뒤를 바라보면 펼쳐지는 숲 속도 바라보며 호사스러운 시간을 누렸다. 그러다보니 그룹 투어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가까이 오기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사람들도 이 아름다운 풍경에 행복해지겠지?


  존스턴 캐년에서 다시 돌아가는 길, 어퍼 폭포까지 다녀온 두시간 반 정도의 산행이 힘들지 않아서 뿌듯했고, 다운타운까지 돌아가는 30분 동안 어둑해지는 보우밸리 파크웨이가 아름다워 행복했다. 새소년의 눈, 비긴어게인 프로그램에서 원슈타인과 최정훈이 부른 자이언티의 눈, 정승환의 눈사람 같은 곡들로 겨울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왔는데 음악 덕분에 풍경이 한층 더 꿈 속이 되었다.



  이 여행의 첫날은 날이 덥고 비가 왔는데, 끝 무렵에 이렇게 펑펑 내린 눈이 덮인 풍경도 볼 수 있었다. 눈이 많은 곳에서  너무 평온하고 즐겁기에 한국의 설산은 어떤지 찾아보았다. 한국의 눈 덮인 산들은 키 큰 침엽수가 빼곡한 캐나다와 다른 나무들이어서 고유하게 아름다웠다. 강원도의 양떼목장은 캐나다의 풍경과 비슷했다. 어떤 빙벽 폭포들은 존스턴 캐년의 어퍼 폭포와 다름이 없었다. 겨울 산행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어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풍경들이 우리 나라의 겨울에 피어난다는 것을 몰랐다. 그 동안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었던건가 싶다. 추위를 너무 싫어해 거의 집에만 있던 나의 미래에 한국의 겨울 산들이 펼쳐진다.


  아무 계획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온 이번 여행은 부정적인 감정이 별로 없고 긍정적인 감정들이 주로 흐르는 좋은 여행으로 끝났다. 눈 덮인 산 속에서 내가 무척이나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국에 돌아가서도 즐겁게 눈꽃 하이킹을 하고 싶다. 무언가를 경험하면 이전까지는 몰랐던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진다.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내게는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설레는 일이다. 그런 세상들을 하나씩 면서 즐겁게 나이 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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