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향기

by 슈르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냄새”라는 답변이 꽤 많았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맞다!” 하며 무릎을 쳤다. 분명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이름을 붙여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냄새였다.


이 냄새의 정체는 ‘페트리코(Petrichor)’다. 가뭄이나 건조한 날씨 끝에 비가 내릴 때 흙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향을 뜻한다. 1964년 호주의 과학자들이 처음 명명한 이 용어는, 건조기 동안 식물이 내뿜은 기름 성분과 토양 속 방선균이 만드는 ‘지오스민(Geosmin)’ 등이 빗방울에 섞여 공기 중으로 비산하며 만들어진다.

황순원은 소설 <소나기>의 말미에 극적인 반전을 숨겨 두었다. 그전까지의 모든 서사는 이 마지막 한순간을 위한 복선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나기가 지나가며 남긴 흙냄새다. 독자들은 결말에 닿기도 전에 이미 지오스민 향기에 취해 버린다. 그래서 그가 공들여 숨겨둔 반전조차 그저 아련한 풍경의 일부로 스쳐 보내게 된다.


페트리코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 냄새가 한국만의 전유물은 아닐 터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을 다녀간 이들이 이 향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온 땅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어도 흙내음까지 가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정작 우리만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한국인은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된 취향(臭香)이 바로 이 흙냄새일지도 모른다.

설날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조차 잊혔던 그 흙의 기억과 그리운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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