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고 싶은 곳과 가야 할 곳

설계도 밖의 길을 걷다

by Tiger Hahn
1983년 겨울,
‘실로암’을 만들며 나는 시대의 모순을 향해 포효하듯 글을 썼다.


하지만 정작 내 개인의 원고지 위에는 훨씬 더 정직하고 서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세상이 한없이 넓고, 인생은 끝없이 앞으로만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전공 서적 사이에 끼워 두었던 그 낡은 원고지에는,

지금의 나로서는 조금 낯설 만큼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었다.

제목은 단순했다. '가기 싫은 곳'.


그 시절 스물한 살의 나의 기도와 일기,

그리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동경을 한 장의 종이 위에 함께 올려놓고 있었다.


붉은 바다 위에 떠 있다는 홍도,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한다는 금강산,

성경 속 이야기를 따라 마음속에 그려보았던 갈릴리 호수.

그리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던 이탈리아와 알프스,

기술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적어 넣었던 서독,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었던 이스라엘까지.


그때의 나는 목표라기보다 동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세상의 이름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게 세상은 아직 '경험'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설계도'였다.


하지만 원고지의 아래쪽에는 조금 다른 결의 문장들이 이어졌다.

'가고 싶지 않은 곳: 병원, 경찰서와 세무서, 그리고 지옥.'

가기싫은곳.jpg '가기 싫은 곳'! 내 삶의 시스템에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피하기 위해 치열한 '변혁'과 '실천'을 다짐


이전 글에서 '변혁은 불확실한 미래와 불이익을 동반한다'라고 당당히 썼지만,

정작 스물한 살의 나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책임이라는 무게를 현실로 만나기 전이었다.

그저 막연히 피하고 싶은 장소들로만 그곳들을 그저 내 인생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인생이라는 기계에 예기치 못한 고장이 발생하거나,

사회적 질서의 오류에 휘말리거나, 내 삶의 투명한 계산을 요구받거나,

그리고 존재 자체가 완전한 오류에 고착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설계도 안에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오류들에 대한 공학적 불안이었다.


그 기록을 다시 발견한 것은 항공인으로서의 오랜 여정을 지나온 뒤였다.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펼쳐 든 낡은 '실로암'지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섰다.

놀랍게도 가고 싶다고 적어 놓았던 그 낯선 땅들은 이미 모두 다녀온 뒤였다.


특별히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일과 사람을 따라 흐르는 삶의 물결이 어느덧 나를 그곳들에 데려다 놓았다.

항공기 산업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이 나를 그 동경의 땅들로 인도한 셈이다.


그리고 문득 그때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곳들 또한

결국은 삶의 여러 형태로 마주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병원의 하얀 복도에서 가족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던 시간,

예기치 않은 책임 앞에서 고독하게 자리를 지켜야 했던 순간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교만했던 자존심이 무너졌던 날들.


그 모든 장면은 스물한 살의 내가 적어 두었던 ‘가기 싫은 곳’의
또 다른 이름들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노트는 단순한 여행 계획표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묻는 서툰 기도문이었다.

가고 싶은 곳은 내가 만나고 싶은 삶의 화려한 겉모습이었고,

가기 싫은 곳은 나의 영혼이 성숙해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연단의 공정'이었다.


삶은 원하는 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피하고 싶은 길까지 묵묵히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나만의 인생 지도가 그려지는 법이다.

빛바랜 원고지 속의 시간이 이제 내게 조용히 묻는다.

“그 모든 길을 지나온 지금,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스물한 살의 나에게 줄 수 없었던 마지막 한 줄의 응답을 덧붙인다.


"네가 적어 내린 그 서툰 설계도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창조주는 네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거친 '연단의 공정'을 거쳐 너만의 멋진 인생 지도를 완성해 주셨다. 두려워 말고, 네가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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