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계급보다 먼저, 사람을 배웠다

나를 벗겨내어 다시 세운 시간들

by Tiger Hahn


과기원의 문 앞에서
나는 한 번 멈추어 섰던 적이 있다.


그 문은 단순한 학교의 입구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 자리였다.


대학 4학년,
나는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는 스스로를 넘어서려 애썼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실패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내 안에 가라앉았다.

그 무게를 품은 채,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조금 늦은 걸음으로
군대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쌓아온
나이도, 학력도, 이름조차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생경한 세계였다.


“45번!”


짧고 날카로운 외침.
나는 내 이름을 잊은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서 있곤 했다.


며칠이 지나자
번호는 이름보다 익숙해졌고,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사람은 때로
자신을 완전히 벗겨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새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대 배치 첫날,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낯선 이름표를 달고 서 있었다.


대학 시절의 후배였다.


그러나 그날 나는

그를 향해

'후배'가 아닌 “병장님”이라 불러야 했다.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짧은 망설임 사이로

내 안의 질서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배웠다.


세상에는
내가 애써 쌓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먼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서와
겸손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비대대 420,


기름 냄새가 깊게 배어든 손으로

총포를 다루던 반복적인 날들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배워갔다.


눈 덮인 길 위로
끝없이 이어지던 행군의 밤,


발끝의 감각은 사라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의 생각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지금, 이 순간을 버텨라."


그 한 문장이
나를 대열의 끝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후의 삶에서도 오래 남는 나침반이 되었다.


어느 깊은 밤,


모두가 잠든 정막 속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이 있었다.

정비대대장의 방이었다.


야간 전문대학원을 준비하시던
대대장님.


그분의 책상 위에는
펼쳐진 학습 자료와
조용한 집중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곁에 앉아
정비병의 손이 아니라


다시
배우는 사람의 눈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한 번 끊어진 길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 길을

다른 방식으로, 끝까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하던 날,


대대장님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보약 한 제를 쥐여주셨다.


그것은
다시 시작하라는
조용한 격려였다.


나는 그 온기를 가슴에 안고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곧바로
사회라는 또 다른 길 위에 섰다.


과기원의 문은 닫혔지만,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항공산업을 새롭게 전개하겠다는
한 기업의 모집 공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멈추어 섰던 길 대신
움직이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서울의 분주한 거리 한복판에서

우연히 그 대대장님을 다시 만났다.

사람.png 넘지 못한 문, 다른 길에서 사람을 배우게 했다.

도심 빌딩의 한 식당 안,
그리고 그 안에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


몇 번이고 그곳을 찾을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분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고 계셨다.


매일 새벽,


서울을 떠나
설악산 오색약수터까지 올라가
물을 길어 오고,


그 물로 밥을 지어
손님들에게 내어놓는 일.


누구도 시키지 않은 그 반복 속에서

나는 군에서 보았던

'절대적인 성실함'을 다시 보았다.


그날의 식당에서 마주한 밥 한 그릇 속에서,
제대하던 날 손에 쥐여주셨던
그 보약의 온기가

다시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것은 계급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음,


명령이 아닌
삶의 숭고한 태도였다.


군대는
나를 낮추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자아를 내려놓게 하고
다시 세우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서슬 퍼런 명령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 속에서

나는 조용히 되뇐다.


과기원의 문 앞에서

한 번 멈추어 섰던 그날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멈춤이 있었기에

나는 다른 길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계급보다 먼저,
나는
사람을 배웠노라고.



작가의 이전글#14 가고 싶은 곳과  가야 할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