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응답하라 1983

실로암 못가에서의 울부짖음

by Tiger Hahn
1983년, 대학 2학년 겨울방학의 한가운데.

잉크 냄새 자욱했던 청년회실에서 우리는 빛바랜 회지 '실로암'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속에는 공학 서적 대신 성경과 펜을 쥔 한 청년의, 투박하지만 치열했던 양심의 기록이 담겨 있다.


제목은 '현대 사회와 기독 청년'.

내 이름 석 자 아래에 정갈하게 적어 내려간 그 글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 시절 뜨거웠던 내면의 방황과 마주한다.


80년대, 부흥의 불길 속에서 느낀 역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사회적 불안과 빈부 격차 속에 한국 기독교의 유례없는 양적 팽창기를 맞이했다.

교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고 찬양 소리는 뜨거웠다. 하지만 공학도로서 논리와 시스템을 배우던 나에게, 현실의 교회는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글을 통해 "교회가 역사적, 시대적 요청에 의해 성립되어 왔으나, 현재와 같이 사회적 요구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일상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고 비판했다. 숫자와 성장에 함몰된 교회의 이면에는 본래의 기능, 즉 "사랑의 기능"과 세상을 정화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공학도로서 시스템의 고장을 감지한 것이다. 팽창이라는 외형에 비해 내적 시스템인 '양심과 실천'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대한 공학적 분노

나는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당시 기독교계의 가장 큰 모순인 "言行不一致"를 지적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장하면서 세상보다도 더욱 냉정하고, 죄악에 앞장서는 모순된 교회와 청년들"을 보며 나는 깊은 슬픔을 고백했다.


수식을 하나만 잘못 써도 다리가 무너지고 기계가 멈추는 공학의 세계에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치명적 오류였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출력'이 나와야 하는 시스템이어야 했다. 나는 다원화된 교회간의 높은 벽을 허물고 현실 사회를 변혁할 인간 지도자를 양성하는 현장이 되기를 촉구했다. 그것은 시스템 전반에 대한 완전한 리빌딩(Rebuilding), 즉 '변혁'의 주문이었다.


'변혁'이라는 불안한 미래를 향한 결단

나는 청년들이 변혁을 주저하는 이유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변혁은 불확실한 미래를 동반하며, 때로는 자신에게 불이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된 안전계수를 추구하지만, 참된 신앙은 때로 그 안전계수를 허물고 뛰어내리는 결단을 요구한다.


나는 "성경, 이보다 더 확실한 미래가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문장으로 공학적인 불안감을 신앙적인 확신으로 치환했다. 그리고 타인의 허물을 대신 담당하고 아픔에 동참하며, 시대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 청년"이 되자고 결론지었다.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뜬 소경처럼, 나는 세상을 향해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40년의 세월을 건너온 응답

4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20대 청년 공학도의 그 글은 단순히 시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내 인생 전체를 지탱할 설계도였다.


"나에게 불이익을 강요할지라도 정의로운 쪽을 선택하겠다'는 다짐.

그것은 38년간 항공인으로서 타협할 수 없는 '안전'과 '정밀'을 추구했던 내 직업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나사 하나, 수식 하나에 수백 명의 목숨이 달린 공학의 세계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는 곧 생명이었기 떄문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 어느때보다 더 복잡해지고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실천되지 않는 진리"라는 모순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나는 은퇴 후 또 다른 '실로암' 못가에 서서 낡은 '실로암' 회지 속의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시대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변혁의 걸음을 내딛고 있는가?"

80년대 기독 청년의 목소리



그 빛바랜 글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을 작동시키는

가장 뜨거운 엔진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의 기능을 회복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빛이 되기를 꿈꾼다.


80년대 한 청년이 꿈꾸었던,

타협하지 않는 정밀함과 책임지는 삶.


그것이 1983년의 내가

오늘날의 나에게 보낸,


그리고

내가 평생을 걸쳐 증명해온

간절한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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