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끝, 땀으로 짓고 온기로 엮은 우리들의 성채(城砦)
신사산 자락 아래 동네 골목을 지나 샛길 언덕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면
그 막다른 길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이 86평의 터전은 아버지가 고달픈 자전거포 일을 견디며
한푼 두푼 아껴 모은, 지독한 성실함이 빚어낸 결정체였다.
그 투박한 흙 위에 비로소 우리 가족의 기둥이 세워진 것이다.
그 집은 벽돌보다 땀으로, 목재보다 시간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의 근거지였다.
여주 능서에 사시던, 집짓는 기술자로 이름나셨던 둘째 고모부는
매일 어린 막내딸의 손을 잡고 그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셨다.
고모부의 숙련된 손길과 아버지의 간절함이 합쳐져 구들장이 놓이고 지붕이 얹어졌다.
가족의 정이 서까래가 되고 기술이 대들보가 되어, 집은 조금씩 그 형체를 갖추어 갔다.
본래 밭이었던 땅 위에 들어선 집이라 창문을 열면 앞과 옆은 온통 푸른 밭의 물결이었다.
집 뒤편은 마치 세상의 끝처럼 가파른 낭떠러지였는데,
어린 내 눈에는 그 아찔한 높이가 오히려 우리 집을 세상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는
천연의 성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황량해 보일 법한 그 집터 둘레를 채운 것은 어머니의 부지런함이었다.
어머니는 집이 지어지는 내내 장날마다 시장에서 사 온 과일 나무와 꽃나무를 정성껏 심으셨고,
텃밭에는 우리 형제의 입을 즐겁게 할 생명의 기운을 채우셨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거실 대들보 아래 나란히 걸려 있던 빛바랜 액자들이 선명하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우등상과 개근상을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투박한 손으로 상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액자에 넣어 시멘트 마루 위 대들보에 걸어두시던 아버지.
당신의 거친 손마디는 어둠 속에 가려진 채 아들의 이름만 환하게 빛나던 그 풍경은,
아버지가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게 한 유일한 훈장이었을 것이다.
"포도가 농익어가던 고향 집 툇마루, 어머니는 자식들의 겨울을 미리 준비하며
한 올 한 올 사랑의 온기를 엮고 계셨습니다."
가을이면 툇마루에는
어머니의 시간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찬 바람이 문틈을 파고들 때면
어머니는 삼 형제의 조끼를 뜨시며, 아이들이 추위에 흔들리지 않도록
삶의 온기를 한 올씩 엮고 계셨다.
밤이 깊어도 전등을 끄지 못하던 날들,
털모자를 한 땀 한 땀 떠서 우리의 학비를 보태시던 어머니의 마디 굵은 손끝에서
나의 다음 계절이 준비되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무렵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막내아들을 눈물로 붙잡으시던 할머니의 마음이 아버지의 발길을 번번이 돌려세웠다.
설봉산 아래 큰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읍내 막내 고모네를 거쳐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셨다.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와 손자들 이야기를 나누시고,
대들보 위 상장들을 흐믓하게 훑어보시던 할머니의 미소는 우리 집의 가장 따스한 풍경이었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노환으로 누우셨고,
앞마당의 포도가 보랏빛으로 농익어가던 그해 가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를 고향에 묶어두었던 가장 깊은 사랑의 끈이 풀린 것이었다.
포도나무가 해마다 포동포동한 열매를 매달 무렵,
우리는 그 정든 집을 뒤로하고 할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효심이 머물던 자리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집의 구들장은 투박한 흙으로 놓였지만,
우리 형제의 삶은 어머니의 뜨개질이라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토대 위에서 자라났다.
언덕 끝 막다른 길에서 시작된 나의 유년은, 그렇게 아버지의 애틋한 자부심과
어머니의 실타래처럼 길고도 따뜻한 사랑,
그리고 막내아들을 붙잡던 할머니의 눈물 어린 축복이 한데 어우러져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