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새로운 길을 내어준 한마디
중학교 3학년,
기술 과목을 가르치시던 담임 선생님은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하지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내일을 오래도록 응시할 줄 아는 깊은 시선을
지니고 계셨다.
진학을 앞둔 나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형편에 맞춰 고향의 익숙한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안전한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삶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던 내게 선생님은 인천에 있는 '기계공업고등학교 장학생'이라는,
고향 밖의 낯선 길을 펼쳐 보여주셨다.
“기완아, 더 넓은 세상을 한번 보려무나.”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음성 안에는 분명한 방향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은 내 삶을 대신 결정해 주려 하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 교실 창밖 구만리 들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복하를
조용히 가리켜 주셨을 뿐이었다.
낯선 타지로 어린 아들을 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망설임은 깊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단한 진심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설득해 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한 진학 상담이 아니었다.
한 소년의 미완성된 시간을 조금 더 먼 곳으로 밀어 보내려는 스승으로서의 고귀한 책임감이었다.
결국 나는 그 길을 택했다.
고향을 떠나던 날,
설렘보다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지만 마음 한편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누군가가 나의 가능성을 온전히 믿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열여섯 소년에게는 세상을 향해 내디딜 작은 용기가 생겨난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내 인생을 억지로 끌어주신 분이 아니었다.
대신 내가 스스로 걷고 싶게 만드는 길 하나를 정성껏 내어주신 분이었다.
삶의 항로는 때때로 거창한 사건보다,
이처럼 조용한 한 마디에 의해 그 뱃머리가 바뀌기도 한다.
복하천 물줄기를 따라 자라온 내 종아리는 이미 타향살이를 견딜 만큼 단단해져 있었고,
설봉산을 바라보며 익힌 인내는 아직 작았으나 내면의 분명한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 단단한 토양 위에 선생님이 내어주신 새로운 길이 비로소 놓인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그때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인생에 길을 내준다는 것은 앞에서 끄는 완력이 아니라,
뒤에서 그가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믿어주는 신뢰의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 삶의 방향이 처음으로 고향 밖을 향하던 그날,
나는 스승님에게서 지식보다 더 깊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미래를 조용히 긍정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었다.